함께
친구가 말했다.
“외로워서 누군가를 만나야겠는데.”
또 친구가 말했다.
“넌 결혼해서도 혼자 사는 것처럼 사는 것 같다.”
내가 늘 가지고 있던 생각이 있었다. 혼자서 잘 살고, 혼자서 잘 노는 사람이 결혼을 해도 잘 살 거라고. 아니면, 혼자서 잘 놀고 잘 지낼 때에 결혼을 생각하라고.
결혼을 한단다. 상대에게서 무언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결혼을 하진 않길 바랬다. 단지, 같이 있음이 좋아서, 같이 있어 달라지는 삶의 모습이 심적으로는 전혀 크게 달라지지 않을 때, 그때는 결혼을 해도 큰 모험이 아닐 것 같았다.
상대에게 무엇을 바라는 마음이 있는지를 알아차리기가 어렵기도 하고, 바라는 마음이 있지만 속기도 한다. 알아차리고도 결혼을 강행하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 함께가 되면 더 좋은 것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건 사회 공동체 모임에서나 가능한 것 아닐까 생각했다. 결혼은, 서로 좋은 것을 나누기 위함이라기보다 서로 부족한 것을 드러내고 그것을 감싸주는 일이 더 널린 것이라 생각되기도 했으니까.
결혼을 하기 전부터 나를 불안하게 한 것이 있다. 24시간 누군가와 함께, 그것도 오랜 시간 있는다는 것. 아, 나는 누군가와 지내는 것이 어려운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10년 20년의 이야기라면, 그것도 한 방을 써야 하는 사람과의 상황이라면 좀 달랐다. 누군가와 언제나 한 공간에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은 나 혼자의 시간을 갖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가게 만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게 있어 ‘집’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생각해 본 것이다.
집. 밖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뉘이기 위해 집으로 향한다. 그런데, 집에 또 다른 이가, 늘 있다. 그 다른 이에게 나의 감정과 그에 따른 행동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불편한 날도 있을 것이다. 결국 맘 편히, 있는 그대로의 내 행동을 다듬고 취하느라 늘 한 박자씩 스텝이 늦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트를 하다가 혼자 있고 싶어서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어 한 날들이 있었다. 혼자 생각하고 싶고, 혼자 헤매고 발견하고 결정하고 싶은 일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연애 상대자는 그런 나를 서운해했다. 자신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냐며 외로워하고 자책도 했다. 마음은 감사했지만 나에게는 부담이 되었다. 그의 서운해하고 슬퍼한 눈이 걸렸고, 그렇게 다시 돌아설라치면 나 자신이 외치는 고요와 안식도 눈에 밟혔다.
홀로 있음을 제대로 어렵게 하는 ‘결혼’이라는 문화 아래 시간과 장소의 공유에 대한 모양은 내가 살아온 방식과 내가 살아가고픈 방식과는 다를 확률이 높았다. 다들 내가, 아니 내 생각과 내 이유가 특이하다고 말했다.
공간과 시간에 대한 공유와 사유. 홀로 있음은 두려워하지 않은 내가 쓸데없이 걱정해야 하는 불편함이자 두려움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함께’ 한다는 것.
가끔은 함께 있고 가끔은 홀로일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지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던 이 마음, 매일 먹을 수 없는 설탕 간식을 향한 어린이 투정 정도로 봐버려도 되려나?
나?
설탕 간식 투정이 천지 사방에 널릴 삶으로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