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또 하나의 판사가 되어 있었다
나는 나름 합리적이고, 배려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이 영상이 논란이 됐다는 걸 처음 봤을 때,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싸우는 게 오히려 의아했다.
댓글을 읽다 보니 더 그랬다.
누군가는 배달원이 너무 불쌍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고객이 진상이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이 장면에서 배달 쪽이 더 잘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 판단이 혹시 내 편향은 아닐까 싶어,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찬찬히 들어 봤다.
─── 실제 대화 내용 ───
배달원: 여보세요?
고객: 네?
배달원: 아 예, 이게 엘베 고장이네요?
고객: 그래서요?
배달원: 네, 그 조금만 걸어 내려오세요~
고객: 아, 9층으로 올라와 주세요.
배달원: 고객님, 제가 다른 데도 배달 가야 되는데
걸어서 거기까지 언제가요…
고객: 올라와 주세요~
배달원: 나 이거 갖다 반납할 거니까 알아서 하세요.
무슨 엘베 고장인데 올라오래 무조건.
고객: 어 그럼 저 신고할게요~
배달원: 엘베가 고장인데 그걸 알면서
일부러 시킨 게 이상한 거 아니에요?
그럼 좀 내려와 주면 되지.
고객: 몰랐는데요?
배달원: 그럼 무조건 올라오라는 게 말이 돼요?
고객: 네, 말이 돼요. 그게 배달이죠?
배달원: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이 대화를 다시 보면서,
내가 불편함을 느낀 지점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처음부터 “죄송한데 가능하시면 내려와 주실 수 있을까요?”가 아니었다.
상황 설명도, 사과도 없이
곧바로 “조금만 걸어 내려오세요”로 시작됐다.
이건 요청이라기보다,
상대의 양보를 전제로 깐 말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고객의 “그래서요?”라는 반응이
무례하게 느껴지기보다는,
“그 말의 결론이 뭐냐”는 질문처럼 보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실제 음성으로 들었을때 그 짜증섞인 목소리가
내 판단의 한목한것 같기도 하다.
그 다음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올라와 주세요”라는 고객의 말은
공격이라기보다는 거절에 가깝다.
집까지 배달받는 서비스라고 믿고 주문했으니,
그 권리를 그대로 말한 것뿐이다.
여기까지는 아직 싸움이 아니다.
서로의 요구가 엇갈렸을 뿐이다.
여기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배달 서비스’의 정의를 다시 떠올리게 됐다.
내가 생각하는 배달 서비스는,
단어 그대로 음식물을
내가 지정한 위치까지 보내주는 서비스다.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그 동선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쪽의 사정이지,
그 자체로 서비스의 범위를 바꾸는 근거는 아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배려는 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선택이어야 한다.
분위기가 바뀐 건,
“이거 반납할 거니까 알아서 하세요”라는 말부터다.
이 순간부터 대화는 요청이나 설득이 아니라,
서비스 중단을 전제로 한 압박이 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엘리베이터 고장인 걸 알면서 시킨 게 이상하지 않냐”는 말이 나온다.
이건 상황 설명이 아니라,
고객의 의도를 추정하고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말이다.
나는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배달원이 힘들다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한다.
엘리베이터 없는 9층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 사실이,
고객에게 ‘내려와야 할 의무’를 자동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여기서 내가 불편했던 건,
누가 더 힘드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배려의 영역이 너무 당연한 전제가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나 또한 예전에 배달이 잘못 온 적이 있다.
메뉴가 하나 빠졌거나,
다른 음식이 온 적도 있었다.
그럴 때 나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다시 오시기 힘드시죠? 그냥 먹을게요.”
이건 배려다.
내가 선택해서 감수한 손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아 죄송합니다. 다시 가져다 드릴게요" 라는 사과가
먼저 따라왔을 때 이야기이다.
하지만 만약 상대가 먼저
“같은 가격이니까 그냥 드세요”
“누락된 건 환불만 해드릴게요”
라고 말했다면,
아마 기분이 달랐을 것이다.
그 순간 배려는 사라지고,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조치가 되어버린다.
엘리베이터 논란도 똑같다.
내려와 주는 건 배려일 수 있지만,
내려와야 하는 건 의무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상황에서
배달원 쪽이 더 잘못했다고 느꼈다.
그건 배달원이 힘든 걸 몰라서가 아니라,
그 힘듦이 상대의 선택을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표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댓글을 보며 묘한 감정도 들었다.
혹시 내가 너무 냉정해진 건 아닐까.
혹시 배려심이 줄어든 건 아닐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건 배려의 문제가 아니라 경계의 문제였다.
나는 여전히 배려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배려를 요구받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죄송한데 너무 힘들어서 그런데 좀내려와 주실수 있나요?" 였다면,
나는 주저없이 내려갔을것 같다.
다만 이번 사건 처럼 “조금만 걸어 내려오세요”
부탁이 아닌 지시 처럼 느껴졌다면...
글쎄 아마 나도 같은 진상이 되지 않았을까?
배려는 선택일 때만 의미가 있다.
당연해지는 순간부터,
그건 갈등의 씨앗이 된다.
다만 한 가지,
이 글을 쓰면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중립을 지키려 애쓴다.
웬만하면 양쪽 입장을 다 보려고 하고,
쉽게 단정하지 않으려 한다고 스스로는 생각한다.
그런데도 이런 흥미로운 논란 앞에 서면,
나 역시 어느새 판사가 되어 있다.
증거를 정리하고,
말의 순서를 따지고,
속으로는 이미 판결을 내려버린 상태다.
만약 내가 댓글에서 키보드 배틀을 별였다면,
아마 더 많은 논리적 비약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상대의 말투를 확대 해석하고,
의도를 추정하고,
내 판단을 정당화하기 위한 문장을 덧붙였을 것이다.
결국 이 논란은
누가 더 옳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쉽게 판결자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엘리베이터는 고장 났고,
대화는 어긋났고,
나는 그 논란들을 보며
‘그래도 나는 좀 다를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아마 그렇게 다르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