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이 필요 없었던 대화

설명이 줄어들수록 대화가 정확해졌던 경험

by 잡생각 수집가

요즘 나는 멘토링을 하고 있다.

대부분은 이직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면접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이력서에서 어떤 경험을 앞으로 빼야 하는지,

보안 업무를 어떻게 말로 설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


보안 멘토링이라는 게 대체로 그렇다.

같은 일을 해도

어떤 표현을 쓰느냐에 따라

성과가 되기도 하고, 그냥 업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늘

‘이력서를 말로 완성하는’ 쪽에 가깝게 멘토링을 해왔다.


그런 멘토링은 대개 한 시간 반 정도를 잡는다.

처음에는 가볍게 던진다.


“이 경험에서 핵심은 이거예요.”


그러고 나면 거의 항상

추가 설명이 필요해진다.


왜 그게 중요한지,

면접관은 왜 그 지점을 궁금해하는지,

어디까지 말하고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솔직히 말하면

완벽하게 의도가 한 번에 전달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멘토링은 보통 이런 흐름을 반복한다.


짧은 설명 → 반응 확인 → 풀어서 설명 → 다시 정리.


나는 그 리듬에 꽤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조금 다른 멘토링 요청이 들어왔다.


이직 면접이긴 한데,

직무는 법 쪽이었다.

컴플라이언스, 법무, 개인정보, 규제 대응.


다만 특이한 점은

그 업무가 보안과 아주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거였다.


보안팀이 겪는 현실,

법과 규제가 현장에서 어떻게 비틀리는지,

감독기관과 여론 사이에서

어디까지가 원칙이고 어디부터가 방어인지.


그걸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멘토링을 준비하면서

나는 습관처럼 분량을 잡았다.


이번에도 한 시간 반.


사례를 던지고,

배경을 설명하고,

“이건 법의 문제가 아니라 정무의 문제였다”는 이야기까지.


이번에는 더 설명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업계도 다르고, 직무도 다르니까.


그런데 막상 멘토링이 시작되고 나서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흘렀다.


첫 번째 사례를 꺼내자마자

상대는 질문을 던지기보다

정리된 문장으로 되받아쳤다.


“이건 법적 쟁점보다

사후에 어떻게 방어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겠네요.”


image.png

내가 다음에 하려고 준비해 둔 말이었다.


두 번째 이슈에서도 비슷했다.


나는 ‘여기서는 설명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이미 구조를 잡고 있었다.


되는지 안 되는지를 묻기보다

“이 결정을 했다는 걸

나중에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를 먼저 짚었다.


설명을 덧붙이려 할수록

오히려 대화가 늘어질 것 같았다.






문득 시간을 봤다.


40분.


이직 멘토링 기준으로 보면

아직 워밍업도 끝나지 않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대화는 이미

핵심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느꼈다.


아,

이건 설명의 문제가 아니구나.


나는 그동안

설명을 잘하는 쪽에 서 있었다.


내 보안 성과를 모르는 사람에게

이걸 왜 위험이라고 봐야 하는지,

왜 이게 성과인지,

왜 이 선택이 최선이었는지를

말로 풀어내는 역할.


그래서 설명을 준비하는 게

당연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 멘토링에서는

설명을 준비한 내가 아니라,

설명을 생략해도 되는 상대를 만난 느낌이었다.


지식을 많이 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복잡한 상황에서

무엇이 쟁점인지 바로 잡아내는 능력.


설명이 줄어들수록

대화는 오히려 정확해졌다.




요즘 내가 느끼는 지능이란

암기력이나 말재주보다,

복잡한 설명 속에서

맥락을 빠르게 잡아내고
불필요한 부분을 덜어내는 능력에 가깝다.


어떤 사람과는

설명을 쌓아야만 대화가 이어진다.

조금만 생략하면

의도가 어긋난다.


하지만 어떤 사람과는

결론만 던져도 충분하다.


사례 하나로

전체 구조를 그려내고,

문장 하나로

쟁점을 요약한다.


그날의 멘토링은

분명 후자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멘토링 시간이 한 시간도 되기 전에

내가 할 말이 먼저 사라져서 꽤 당황했다.


보통은 시간이 모자라서

설명을 줄이는 쪽인데,

이번에는 반대였다.


멘티의 추가 질문 덕분에

간신히 한 시간을 채우긴 했지만,

중간중간

조금 허둥댔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준비를 덜 했나?’

‘내 말빨을 너무 과신한 건가?’

‘설마 도움이 잘 안 됐던 건 아닐까?’


image.png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서 멘토링이 끝나고도

한동안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데

리뷰를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최고점.

그리고

도움이 되었다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된 긴 리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나는 보통

한 시간 멘토링을 요청받아도

한 시간 반 분량을 준비한다.


지식을 더 채워주고 싶어서이기도 하고,

‘이 정도면 충분한가?’라는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다.


그래서 이렇게

시간이 딱 맞아떨어진 멘토링은

사실 거의 없었다.


이번 경험이 특별했던 이유는

내가 말을 덜 했기 때문이 아니라,

설명이 요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설명을 잘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설명이 남아버린 사람에 가까웠다.


다만 분명한 건 하나다.


세상에는

설명을 잘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설명을 거의 요구하지 않는 사람도 존재한다는 것.


그날 나는

설명을 거의 요구하지 않는 사람을

아주 또렷하게 처음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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