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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민지 Oct 24. 2022

건조기 때문에 조금 울었어

여동생이 결혼을 했다. 여동생 부부의 살림살이를 내가 전부 알 수는 없지만, 엄마가 보탠 돈으로 여동생이 세탁기와 건조기가 같이 붙어있는 전자제품을 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온 가족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늘 여동생은 건조기를 써보니 편하고, 좋다고 자주 이야기했다. 자주라고 하기에는 매번 이야기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맞겠다. 여동생이 하는 건조기 찬가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엄마 고마워.’라고 표현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조금 쑥스러워 ‘엄마가 사준 건조기 덕에 집안일이 쉽다.’라고 표현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 엄마가 더 뿌듯해 하시길 바라는 마음에 나는 옆에서 혼신의 리액션을 하게 된다. ‘나도 갖고 싶다. 건조대에 빨래를 널기 귀찮다. 건조기로 건조하면 옷이며 수건이며 보송보송한 것이 기분이 좋을 것 같다.’


‘엄마 덕에 동생 결혼생활이 더 행복해졌네.’하고 말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나는 건조기가 당장 필요 없고, 건조를 할 만큼 빨래가 많지도 않으며, 건조기를 살 정도의 돈은 있지만 엄마 덕에 동생 결혼생활이 더 행복해졌어.’ 이렇게 말하면 더 이상하구나.


건조기는 없어도 건조대가 넉넉하고, 건조대가 넉넉해도 하루 종일 볕이 잘 들어오는 넓은 옥상이 있다. 일주일 밀린 빨래를 해도 옥상 햇볕은 내 옷을 하루만에 바짝 말려준다. 무더운 여름에는 반나절도 안 되어 빨래 건조가 완료된다. 자연 건조기 혜택이 이렇게 좋은 것인 줄 옥상이 없을 때는 몰랐다. 물론 건조기가 있으면 살림이 더 단순하겠지만 혼자 사는 나는 충분히 살림이 단순하다.


약속 없는 일요일 오전 침대에서 10시쯤 깼는데 은행 어플 알람이 와있고 은행 어플 알람만 봐도 나는 가끔 심장이 두근대지만 침착하게 알람을 확인했을 때는 엄마가 보낸 백만원이 보였다. 백만원. 빌려준 적도, 빌려 달라고도 하지 않은 백만원이 입금되니 일요일 오전부터 식은 땀이 나고 엄마가 이상한 보이스피싱에 당한 걸까 싶었다. 무한한 상상력을 끝내고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햇살이 눈부시게 내려서 옥상에 빨래를 널기 딱 좋은 아침이었다. 


백만원 뭐야? 

건조기 사. 

건조기를 왜? 

갖고 싶어 했잖아.

내가 언제?

17kg 정도는 사야 이불 건조도 할 수 있어.

아니 난 건조기 필요 없어.

사라면 좀 사.


사라면 좀 사라는 말에는 더 이상 물으면 화를 내겠다는 엄마의 강한 어조가 느껴졌다. 34년 동안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엄마가 언제 화를 내실 지 감이 온다. 일단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백만원을 보내고 건조기를 사라는 건 어떤 이유일까 고민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건조기를 사고 싶다고 한 건 여동생의 건조기 찬가에 몇 번의 리액션을 붙인 것 말고는 없었다. 


그런 리액션을 한 지 1년은 되가는 것 같은데, 그럼 1년을 넘게 신경을 썼을까? 당신도 아직 건조대에 아빠와 남동생의 빨래를 잔뜩 널고 있으면서 혼자사는 나에게 대뜸 건조기를 사라는 건 어떤 마음일까? 내가 빨래를 정말 하기 싫어 보였나? 아니 근데 이 돈은 어디서 난 거지? 드디어 로또가 맞았구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궁금증이 이어지고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 잔뜩 심란한 마음이 된 채로 다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100만원이 어디서 났어? 로또 됐어?

네가 그건 안 물어봤으면 했는데. 만기된 게 있는데, 빚 갚고, 아무개 챙겨주고, 그러다 보니 딱 200만원 남더라. 너 100, 나 100 갖자.

그럼 나 이 돈 못 받아. 엄마 다 써.

너는 진짜 좀 건조기 사라고 하면 말 듣고 사면 되지.


화 내려는 엄마 말을 자르고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티끌을 모으고 모아 만든 목돈을 당신이 지지도 않은 빚을 갚고, 당신 보다 어려운 사람을 챙겨주고, 남은 200만원을 또 나눠 갖자는 엄마에게 나는 100만원을 돌려줘야 한다. 이 돈으로 건조기를 사면 건조기를 돌릴 때마다 목이 메일 것 같고, 보송한 수건에 얼굴을 묻고 울 것만 같다.


어떻게 돌려주는 게 맞을까?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하다며 의례적인 말로 포장을 해서 돌려주면 될까? 계좌로 송금을 하고 아 몰라 하고 당분간 잠수를 탈까? 엄마는 일요일 아침에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걸까? 내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건 하나도 모르겠지.


결국 100만원은 몇 주 동안 내 계좌에 고이 놓여있다. 내 계좌의 잔액과 엄마의 100만원이 섞여 있지만, 100만원은 어떤 영혼인 것처럼 선명하게 계좌에 놓여있는 느낌이다. 그러다 문득 그냥 좀 엄마 말 듣고 건조기를 사면 엄마도 편하고 나도 편할 것을 왜 늘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지 생각했지만 모르겠다. 


돈을 벌어보면 5만원 지폐 한 장도 저마다의 손에서는 다 다른 무게인 것이다. 누군가는 5만원을 벌기 위해 셔츠가 다 젖도록 일해야 하고, 누군가는 5만원을 벌기 위해 술이 잔뜩 취한 취객을 태우고 운전을 한다. 반대로 돈을 쓰다 보면 5만원 지폐 한 장 정도의 술 값은 가볍게 쓸 수 있어도 5만원 지폐 한 장 정도의 기부는 어렵다. 같은 5만원이라도 벌고 쓰는 사람의 마음먹기에 따라, 자라온 환경에 따라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안다. 그럼 지금 여기 100만원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가만히 들여다보면 도저히 건조기 따위와 교환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젖은 빨래로 집 안 습도가 높아지는 편이 낫다. 내가 계속 우는 것 보다.


건조기 사는 문제로 내가 울게 될지는 몰랐다. 엄마한테 돈을 돌려주겠다는 말도, 건조기를 샀다는 소식도 어느 쪽도 전하지 못한 채 누워 작은아씨들 마지막 회를 보고 있었다. 가난한 삶을 살던 주인공들이 우여곡절 끝에 결국 거액의 돈을 손에 쥐기까지 내가 작은아씨가 된 것처럼 마음 졸이며 봤는데, 작은아씨들 중 막내 오인혜의 대사를 듣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 늘 두려웠어. 내가 아무것도 돌려주지 못할까 봐. 언니들 사랑에 값 하지 못하는 아이가 될까 봐. 

<작은아씨들 12화>


난 두려운 것이다.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내가 아무것도 엄마에게 돌려주지 못할까 봐. 엄마의 피땀눈물에 값 하지 못하는 어른이 될까 봐. 그게 무서워서 엄마의 100만원을 쉽게 못 받겠다는 비겁하지만 진실인 결론을 마주했다.


이제는 선택을 해야 될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돌려주는 대신 건조기를 사야겠다. 그러면 좀 더 두려움을 이겨내고 용감하게 살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엄마의 피땀눈물이 헛되지 않도록, 엄마의 사랑에 제대로 값 하는 멋진 어른이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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