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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민지 Nov 14. 2022

우산을 쓰다가 조금 울었어

  가을비가 흠뻑 쏟아지더니 가을 냄새가 더 짙게 나는 것 같다. 흙냄새와 시린 공기가 코 끝을 찡하게 울린다. 꽃무늬 우산이 어딨는지 헷갈린다. 집에도, 차에도 꽃무늬 우산이 없어 우왕좌왕 하다가 회사에 두고 온 사실이 떠오르면서 안도한다. 혼자 타지에 살다 보면 갑자기 쏟아지는 비가 반갑지가 않을 때가 있다. 아무도 날 데리러 올 수 없을 때.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할 방법이 없어 편의점에서 투명 우산 하나 사들고 집으로 터덜터덜 오다가 서서 빗소리를 듣는다.


  지금보다 더 못난 사람일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저학년 여름방학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비가 쏟아졌고, 나는 우산이 없었다. 엄마가 우산을 챙기라고 분명 얘기했겠지만 나는 학교 가는 것이 즐거워 뛰어왔던 것 같다. 1교시부터 쏟아지는 비는 하교를 할 때까지도 그치지 않았다. 친구들은 저마다 준비한 우산을 꺼냈다. 개구리 얼굴이 귀엽게 그려진 초록색 우산, 샛노란 우산, 수백 개의 딸기가 그려진 우산. 그 알록달록한 우산들 속에서 같이 쓰고 갈 친구가 없는지 살펴보다가 우산이 없는 친구들 몇몇이 현관문 앞에서 나와 같이 멀뚱멀뚱 서있는 것을 보고 내심 안심했던 것 같다.


  저 멀리서 친구 어머니, 아버지들이 손을 흔들며 오고 계셨다. 부모님들은 저마다 내 몸보다 큰 것 같은 우산을 쓰고 한 손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밝고 화사하고 짜리 몽땅한 우산들을 들고 오셨다. 지금이라면 넉살 좋게 '어머니~ 같은 방향인데 데려다주시면 안 될까요?' 하겠지만 아직 그런 넉살을 배우기에는 구구단, 실로폰, 줄넘기 같은 것들을 배우던 때였다. 우산 없이 우리 가게까지 달리면 10분이 걸릴까? 5분이면 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뜻밖에도 왜 우리 엄마, 아빠는 데리러 오지 않는 것인지 서글퍼졌다.


  서글퍼하다가도 비가 왔다는 이유로 울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았던지 나는 이제 가게까지 전속력으로 달려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때 같은 동네에 아주머니가 데려다주겠다고 하셨다. 내가 뛰어가면 된다고 했더니, 이주머니와 친구는 한 우산을 쓰면 되니 이 우산을 쓰고 가라고 내미신 예쁜 분홍색 우산에서 나는 삐쭉 입이 나왔던 것 같다. 이상하게 어렸을 때는 그런 호의가 어색하고, 다 젖은 운동화보다 더 불편했다. 우산을 챙겼더라면 벌써 집에 도착해서 만화를 실컷 봤을 텐데, 부모님이 데리러 왔더라면 문방구에 들러 간식을 잔뜩 샀을 텐데 하는 잡다한 설정들이 떠오르면서 나는 우산을 거절했다. '싫어요.'


  당황한 아주머니와 친구를 보내고 이제는 비를 맞고 달려야지 했을 때 운동장 끝에서 낯익은 모습이 걸어왔다. 할머니였다. 흐물흐물한 우산을 쓰고 손에는 가게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주워 왔을 검고, 무겁고, 못생긴 우산 2개를 들고 오셨다. 정확하지 않지만 하나는 아직 수업 중인 사촌오빠를 주려고 2개를 들고 오신 것 같다. 반갑게 할머니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데, 온 마음을 다해 그러고 싶은데 못생긴 우산과 엄마, 아빠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미워 할머니를 보고도 전속력으로 가게로 뛰었다.


  우리 가게는 우리 동네에서 제일 바쁜 곳이고,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아주 조금 덜 바빴을 할머니가 아픈 무릎으로 학교까지 걸어오셨겠지. 튼튼한 검정 장우산은 나 하나, 오빠 하나 씌우고 당신은 제일 훌렁거리는 우산을 쓰다 만 채로 늦은 건 아닐까 어깨가 젖고, 물웅덩이를 피하다 발이 젖었겠지. 그날 크게 혼났는지, 어르고 달래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나는 건 저녁 내내 죽상인 얼굴로 틱틱댔던 내 모습이다. 부모님이 날 데리러 오지 않은 사실보다 내가 할머니를 두고 온 사실이 더 가슴이 아프기 시작한 건 할머니가 하늘로 떠난 고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가끔 비가 오는 날에 학교 운동장 어귀를 지날 때나 긴 산책로 끝을 볼 때면 저 멀리서 할머니가 헐레벌떡 오는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그때마다 우산을 본다. 진분홍색 꽃무늬 우산을 보고 그때 검정 우산을 쓸 걸. 할머니랑 문방구에 들려서 밭두렁이랑 쫀디기, 알사탕을 잔뜩 사서 나눠 먹으면서 올 걸. 집에 도착해서 끝나가는 만화를 신나게 볼 걸. 할머니랑 맛있는 저녁을 먹고, 오늘 데리러 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할 걸. 바닥에 흩어지는 비만큼 무의미한 후회만 잔뜩 하고 눈물을 글썽인다.


  비가 오는 날 할머니가 날 데리러 온 기억은 자주 오는 비만큼 떠오른다. 그래도 세월에 무뎌지는 슬픔만큼 운동장 어귀를 봐도, 비가 와도, 검정 우산을 써도 더 이상 울지 않을 정도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쯤 나는 또 울었다. 술에 취해 노래방에 갔을 때 모두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지만, 정작 나는 친구의 목소리로 처음 들었던 임영웅의 <이제 나만 믿어요>를 거나하게 취한 친구가 열창할 때 취기를 빌려 눈물을 또 조금 흘렸다. '궂은비가 오면 세상 가장 큰 그대 우산이 될게. 그댄 편히 걸어가요.' 할머니는 궂은비가 오면 다시 또 내 우산을 챙겨 들고 올 것이다. 궂은 인생에도 내 머리가, 어깨가, 발이 젖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인생의 몰아치는 풍우도 굳건히 버틸 수 있다. 가을밤 빗소리에 할머니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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