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경아의 딸> 리뷰
영상통화 장면을 통해 끊임없이 다른 존재를 확인하고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경아, 그런 엄마로부터 남자 친구를 숨길 수밖에 없었던 연수. 그와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지만 헤어지고 나서도 끊임없이 연락하고 찾아오는 상현은 두 사람의 관계 영상을 유포한다. 이별을 거부하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전시한 것이다. 그 영상을 받은 친구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연수는 평범한 일상에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고통스러움에 빠진 연수의 모습보다는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아는 연수를 비난한다. 고통에 허우적대 빠져나오지 못했던 날, 연수는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존재에게 가장 최악의 말을 듣는다.
지극히 평범했던 일상에 사랑했던 이에게 당하는 배신의 시간은 경아에게도, 연수에게도 일어났다. 연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경아의 편이 되어주었고, 경아는 연수에게 편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렇기에 가장 의지했던 존재에게서 오는 흠집의 연속성은 기존의 형태를 더욱 처참하게 망가진다. 이미 망가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음에도 끊임없이 무너지는 마음의 모습이 영화의 잔잔함으로 인해 더 크게 와닿는다. 그렇게 일상에서 들려오는 가시 박힌 뾰족한 말들이 가슴을 계속 찔러 고통의 순간을 안기지만 그런 순간 속에서도 살아보려는 연수의 뒷모습이 뇌리에 박힌다. ‘피해자 다움’이라는 단어에 얽히지 않고 슬프다가도 웃고 화나다가도 평소처럼 누군가와 마음을 털어놓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평범함을 그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회가 할 수 있는 최선과 개인이 할 수 없는 최선이 흐리지만, 선이 맞물린다.
어디서 갑작스레 튀어나올지 모를 불행의 존재, 그로 인해 방에 갇혀 몸을 움츠리고 불안에 잠식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런 순간은 계속해서 반복되겠지만 살아가기 위해 불안의 어둠에서 헤엄쳐 나와 스스로 일어나고 또 앞으로 걸어간다.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고 또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이해’를 통한 ‘치유’를 건넨다. 누군가에게 받을 수 없던 그 단어는 자신을 가두지 않고 나아갔던 그의 의지와 선택, 그리고 행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피해자의 고통스러움을 최소화하고 피해자 다움의 정의를 내리지 않으며 모녀와의 관계를 필두로 하였지만, 모녀의 대화로 인해 내 마음에 왠지 모를 생채기가 났다. 가장 가까운 존재보다 가깝지 않은 타인이 건네는 위로에 그저 눈물을 흘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이 슬픔은 내가 엄마에게 있어서 가장 불편한 존재가 되어 더 이상 볼 수 없고 숨 쉬지 않아야 나를 위로해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제목은 ‘경아의 딸’이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모녀간의 사랑이 드러난다거나 서로의 마음을 토닥여 주는 장면은 드물다. 다만 ‘연수의 방’에서 각자의 시간이나 감정은 다르지만, 고통과 회복의 순간을 반복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그 공간에서 나온 연수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경아는 그 공간에서 연수를 이해하고 화해의 손길을 이번에는 먼저 내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네 탓이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