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트랜짓> 리뷰
혼란스러운 영화 속 발견할 수 있는 어떤 만남은 모두가 떠나는 이 공간에서 벌어진다. 만남이라는 표현은 분명 반가운 것임에도 이들에게 있어서 이 만남은 사건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신분이 있어야만 통과할 수 있는 시대에서 만난 어떤 이들의 만남은 필연적이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들에게 허용된 평화가 얼마 남지 않은 곳에서 남겨진 자와 떠난 자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이야기의 끝은 어떻게 장식될 것인지 더욱 궁금해진다.
나치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어 여러 사람들이 섞여 들어오고 나치의 점령이 점점 가까워지는 탓에 평화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절망감이 프랑스 전역에서 동시에 피어오르고 있었고 당연하게도 신분을 확인하는 절차로 인해 경비는 삼엄해진다. 그렇게 경비가 삼엄한 이곳에서 그림자처럼 몸을 숨기고 있던 게오로그가 부탁받은 편지를 전달하려 하지만 그는 이 곳에 없었다. 정착을 위해서는 거쳐야 하는 곳, 마르세유에서 만난 어떤 여인은 스쳐 가듯 계속 마주친다. 시야만큼 가까워지는 마음의 거리는 그와의 만남을 바라며 제 것이 아닌 것에 점점 욕심이 나기 시작한다. 교차하듯 우연한 만남의 연속으로 필연을 증명하듯 남겨진 이와 떠난 이가 선명해진다. 누군가를 구분하지 않고 펼쳐지는 어떤 비극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왠지 모를 희망이 피어오르기에 더욱 무섭게 느껴지고 영화에 스치듯 지나갔던 “불행한 사람에게 타인의 행복은 달갑지 않았다.”라는 말로 공감되지 않았던 수많은 순간들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작가 바이델의 가방에 들어있는 두 통의 편지와 게오로그가 전달하지 못한 두 통의 편지는 전혀 다른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 편지가 전달되었다면?‘ 하는 생각은 이따금 찾아오는 혼란과 흘러가는 시간의 찰나 속에서 펼쳐지는 슬픔 섞인 희망이 동시에 찾아온다. 두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사라졌기에 존재할 수 있다는 희망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를 찾아오며 어떤 질문을 불러온다. “누가 먼저 상대를 잊을까요? 떠난 사람일까요 남겨진 사람일까요” 영화의 전체를 관통하며 왠지 모를 무기력함을 넘어서 놓치고 있었던 어떤 의미를 생각해보게끔 한다. “남겨진 사람은 상대를 못 잊는다”라는 말을 남긴 채 남겨진 이와 떠난 이만이 남아있었다. 남겨진 사람은 떠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떠난 사람은 남겨진 사람이 되기도 하는 이런 모순 속에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을 잊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그 당시 유럽의 차별적인 모습이 현재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함인지 영화 속은 현대적인 배경이지만 이야기는 나치 집권 당시의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이질적이면서도 그렇지 않은 모습이다. 과거의 모습이 현대의 배경에서 펼쳐지고 연극 같은 설정이 관객과 영화의 거리를 멀게 하면서 영화의 깊이는 한없이 깊어진다. 어디서 어떤 이야기가 튀어나올지 모를 긴장감 때문에 영화가 끝나도 끝난 것 같지 않다. 환상 같은 이 이야기는 영화에 표현되었던 감정이 혹여 거짓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듦과 동시에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교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