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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드레 Sep 15. 2022

타의에 의한 작위가 나를 향한 자의로.

영화 <송곳니> 리뷰


내부에 의해 외부가 가려진 이곳은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하다. 그렇게 높지 않은 벽과 더불어 밀폐된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괴상한 언어 그리고 알 수 없는 행동들, 그 자체로 폭력적이며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들은 외부와 단절되었지만 그것이 일상인 듯 자연스럽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자발적으로 갇힌 이들의 기괴하면서도 섬찟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두 번째 장편영화 '송곳니'를 소개하려 한다.



부모의 보호라는 일념 아래 세 남매의 모든 말과 행동이 통제되고 있다. 특히 아버지는 이 집에서 유일하게 외부세계를 접촉하는 만큼 외부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경계심을 더하는 방식을 학습시키고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과 어리광 그리고 1차적인 욕구만 수행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한다. 언어를 가르치지 않았다면 짐승의 언어를 낼 정도로 외부와 단절된 삼 남매에게 다가온 크리스티나에 의해 조금씩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경험해보지 못한 외부의 공포에 의해 집안에 갇혀 있었던 삼 남매의 모습은 ‘실제’보다는 ‘보이는 것’에 초점을 맞춘 어떤 모습으로 비친다. 두려움으로 인해 자유를 억압한 이들이 어떤 연유로 행동하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어떤 사소한 규칙은 그들의 가정을 대변한다. 그 규칙들은 사실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밥먹듯이 세뇌를 당했던 이들에게는 당연했다. 그렇게 한번 똬리를 틀은 생각은 풀어지지 않는다. 흐트러지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완벽함'에 흠이 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게 일부를 제외하곤 끝나지 않을 듯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들의 끝은 어떻게 장식될까.



다소 가학적이며 불쾌한 장면들의 연속으로 등골이 서늘해지지만 작은 가정을 통해 큰 숲을 보게 만든다. 현실과는 거리가 먼 영화의 이야기 속 보호 목적의 통제는 개인에게 있어서 폭력적인 억압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각자의 결단은 다른 방식으로 펼쳐지지만 '폭력'과 '파괴'의 이름으로 덮인 것 같았다. 권력 끝에 남은 폭력의 잔해는 생각보다 깊어서 더욱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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