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400번의 구타> 리뷰
경험해보지 못한 시대를 알기 위해선 그 시대를 대표하는 영화를 보면 많은 도움이 된다. 1950년 말,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감독들의 영화 스타일을 한 곳에 묶은 말이 바로 누벨바그(nouvelle vague)이다. 누벨바그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풀어내어 더욱 사실적이게 표현된 영화 '400번의 구타'가 1월 25일 재개봉했다. 기존의 영화와는 다른 변화를 통해 영화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 갔던 그때 그 시절의 영화이다. 앙투완 드와넬 5부작의 첫 번째 이야기가 시작된다.
엉망의 시작.
학교에도 가정에도 마음을 붙일 수 없었던 앙투완은 엉망의 행위를 반복한다. 앙투완이 규정에서 벗어난 행위를 할 때마다 선생님은 그의 멱살을 올려붙이고 부모님은 그릇된 행동을 막아선다. 언뜻 보면 앙투완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될지도 모를 어른들의 훈계는 그저 통제를 위한 수단이다. 양방향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소통 방식은 그저 메아리에 불과하다. 훈계를 하면 할수록 정반대의 길로 나아가는 소년에게 있어서 그저 족쇄와 다름없었다. 그것은 그릇되었음에도 고치려 들지 않는 시대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청춘의 날림
소위 일탈이라고 하는 행위는 기존의 규범에 반하여 일어나곤 한다. 어쩌면 앙투완에게 있어서도 일탈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집과 학교는 어떤 믿음도 사랑도 얻을 수 없는 형식적인 공간으로 전락해 버렸다. 어느 곳에서도 안정감을 느낄 수 없는 앙트완의 외로움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의 감정보다는 그의 행동에만 관심 있는 어른들은 차가운 공간으로 내몬다. 그 차가운 공간은 앙투완에게 있어서 전혀 도움 되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저 획일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폭력은 폭력을 낳을 뿐이다.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으니
차라리 거짓말하는 게 낫죠.
사랑하는 것들.
친구와 함께 자유로운 거리에서 만끽하는 일탈은 기존의 교육과는 다른 깨달음을 얻게 한다. 온전히 나의 의지대로 행동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된다. 어른들이 알려주지 않았던 혹은 무시했던 것들은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제자리에 남아있다. 쉴 틈 없이 달려온 억압의 울타리를 넘어선 그가 온전히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탁 트인 곳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낸다. 그 작은 몸으로 마주한 파도는 유일하게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 거대한 삶의 형체였다. 쉴 새 없이 달려온 목적지를 등진 모습이 두려워 보이면서도 비장해 보인다.
오역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400번의 구타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나는 가정폭력에 관한 이야기라고만 느꼈다. 하지만 faire les 400 coups 이란 제목의 실제 뜻과 내용을 떼어내서 들여다보니 영화의 제목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말들은 끼워 맞추기 나름이라지만 전혀 다른 방식의 번역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해치곤 한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속담인 '400번의 매질이 아이를 어른으로 만든다'라는 말을 통해 시대가 묵인하고 또 용인했던 부조리를 꼬집는 모습에서는 적절한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시대에 아니라고 말하는 감독의 메시지가 굉장히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