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리뷰
잭 클레이튼 감독, 매기 스미스 주연의 <주디스헌의 외로운 열정>은 1987년에 영화화되었다.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이며 소설 속에서 고독하고 외롭지만 생생하게 살아 숨 쉬던 캐릭터가 영화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었을지 상당히 궁금해졌다. 영화 속 줄거리는 이렇다. 주디스 헌은 40대 미혼의 여성으로 어릴 때부터 자신을 돌봐주던 이모를 간호하다 여의고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라이스 부인과 아들 버나드, 라이스 부인의 오빠인 제임스 매든, 다른 세입자들 사이에서 어떤 이야기를 펼쳐낼까.
책에서 묘사된 주디스 헌과는 다른 외형을 하고 있으나 호감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통제를 하지 못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나 자주 약속을 어기는 장면은 그녀에게 치명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술을 입에 대고 또다시 실수를 반복한다. 물론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주변에 폐를 끼치는 모습으로 인한 사람들의 반응은 전반적인 자신의 평가로 드러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녀를 빼곡하게 이루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과는 다르게 주디스는 끊임없이 외로움을 느낀다.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타인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꽂힌 부분에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지만, 다른 이야기에는 별다른 호응을 하지 않는다. 이모를 간병하면서 사회와 고립이 되었고 그만큼 혼자가 익숙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 것 같았다. 긴 고립의 시간만큼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적응하는 것도 상당히 어려웠고 그 사정을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는 데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것이다.
보다시피 영화는 과거 회상 장면이 많이 나오는 편이다.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현재의 시간과 사람들 사이에서 받아 들여지지 않는 자신은 과거에 머물러 있게 만든다. 이모와 피아노. 그 두 개의 단어는 과거와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과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된다. 하지만 자신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자부심과 마찬가지라고 표현한다. 이모를 간호하는 동안 오랜 시간 다른 시간에 갇혀 현실감을 잃었고 그동안 멈춰버린 자신의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순적이면서도 양가적인 것들은 자신이 여전히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며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도움 되지 않을 의존이지만 그녀를 유일하게 살아가게 하는 대상이다. 그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것은 '술'이었으며 그 모든 것을 망치기 도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주디스 한을 과거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건 종교였다. 그녀가 힘들 때마다 찾던 종교는 진정한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던 순간, 형식적인 조언은 존재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주디스 헌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기대 이상의 신앙을 마주하지 못했으며 결국엔 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게 된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보는 이들에게도 형식적인 반성과 용서가 과연 진정한 회개가 맞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든다. 모든 것은 질문과 진정한 용서가 뒷받침되었을 때,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왜 모든 것이 형식적으로 느껴지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었다.
주디스 현과 매든의 마음이 엇갈리고 있음은 사소한 대화에서 보인다. 사랑에 빠져서 들리지 않는 것인지, 부정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 간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호감에서 오는 관심은 ‘주디스 헌’에게 한정되었으며 재력에서 오는 관심은 사랑으로 더 뻗어나갈 수 없는 감정이었다. 주디스의 열띤 대화와는 다르게 매든의 관심 없어 보이는 무심한 말투는 현재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것 이상으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줌에도 현실을 깨닫는 과정은 상당히 오래 걸렸다. 매든의 본심은 정말 초반부부터 알 수 있어서 그녀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해지는 순간이다. 세속적 욕망과 원초적 본능으로 이루어진 한 남자와 함께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시대에 갇혀, 사랑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는 길을 건넌다. 사랑이라는 거대한 결핍은 누군가를 소유하고 가지는 일이 누군가의 특권으로 변모한다. 하지만 그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는 판단은 그들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이었다. 같은 행위를 해도 신분에 따라, 성별에 따라 달라질 원인이라면 그것은 사랑의 형태를 맺을 수 있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주디스 헌의 짝사랑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당연스러운 관심과 호감을 사랑으로 착각했으며 자연스레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녀의 모든 정보는 부담스러움을 느끼게 했으며 이전과는 더 먼 거리를 유지하게 만든다. 모두가 자신을 이해해 줄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 팽배하게 펼쳐진 그 편견을 주디스 한에 국한되어 그 모순된 점을 꼬집을 필요는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영화 속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의 행위를 보았을 때, 누군가 명백하게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는 장면들로 가득했다. 다만, 버디와 매든의 행위는 범죄행위가 맞다. 소설에서는 이 부분을 메리라는 여성을 통해 여성에게 이루어지는 억압이나 피해자임에도 ‘왜 저항하지 않았냐’라는 2차 가해를 드러내는 장면이 있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 부분을 과감하게 생략한듯하다.
소설과 영화는 전체적으로 비슷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감정 묘사나 관계 표현이 조금은 달랐다. 물론 기본적 바탕은 그녀가 존재한다고 해서 사랑할 필요도, 싫어할 필요도 없다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그들이 왜 주디스 한을 싫어하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에서 보다 더 명확하게 답해주었던 건 소설이었다. 그녀의 자유를 즐기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듯이 사람들 또한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소설은 주변 사람들을 통해 주디스 헌의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그녀의 내면을 다소 세밀하게 표현하여 양가적 감정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반면, 영화에서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많이 보여주고 서로의 다른 속마음을 보다 더 명확하게 표현한다. 그래서 주디스 헌의 외로움이 더 깊게 느껴지고 더 나아가 안타까웠다. 또한, 주디스의 헌의 내면을 배우의 표정을 통해 더욱 잘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좀 달랐다. 싫어해야 할 이유를 더 깊숙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소설의 원 주제와는 좀 멀어지는 느낌이라 아쉬웠다. 영화에서는 영화로서 표현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래에 해당 영화의 책 리뷰 링크를 달아 놓았다.
https://mindirrle.tistory.com/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