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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드레 Sep 09. 2024

믿음 뒤에 숨겨진 이면, 구원 혹은 파멸.

영화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 리뷰


불편함을 감수해야 알 수 있는 진실은 어떤 형태를 하고 있을까. 기괴함을 위한 기괴함인지 모를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가 디즈니플러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제77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제시 플레먼스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장편이 아닌 옴니버스 형태로, 각기 다른 인물들이 얽히고설킨 이야기 속에서 인간의 욕망, 억압, 그리고 권력을 탐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에피소드들이 2시간 44분이라는 긴 상영시간을 꽉 채우며, 매 순간 관객에게 깊은 불편함과 함께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R.M.F. 의 죽음> - 솔직함


정해진 규율에 따라 사는 것은 그에게 너무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상대방은 정신적인 압박을 통해 원하는 것을 이루어 내려고 한다. 세상의 일들이 그의 손에서 좌우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모순적이다. 자유를 준다는 것은 이들에게 또 다른 억압으로 찾아오기 마련이다. 자유를 얻고 버림받은 이 남자는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압박감에 의해 정해진 규율에 따라 사는 그 행복감에 취해 들고 죽음으로써 다시 태어났지만 영화를 보는 나에겐 죽은 것이나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솔직함이라는 친절은 역설적이게도 위선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상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좁아질 수 있고 그 안에 끊임없이 갇히길 원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속감' '정체성'으로 오랜 시간 인간은 얼마나 괴로워했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억압에 의해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정해진 방식대로, 다른 사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편안한 길로의 인도일지는 몰라서 적어도 자신에게 정답일 수는 없었다. 


이 영화에서는 누군가의 억압에 대한 것이 아닌 권력을 지배하는 자의 욕구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는 자연스럽게 지배당하는 자의 입장에 몰입하게 된다. 그는 왜 그렇게 억압에 익숙해져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가. 객관적인 상황 판단보다는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일구어낸 현대인의 정신적 구속이자 고립된 인간성을 보여준다. 


어쩌면 <R.M.F의 죽음>은 현대 종교에 대한 비판일지도 모른다.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억압하고, 자유를 제공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상 더욱 강력한 구속을 부과하는 이중성을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입맛대로 비벼 놓고 내놓은 신격화가 기존의 종교와 동일한가를 생각해 본다면 영화는 신앙과 권력의 결합이 어떻게 새로운 형태의 억압을 만들어내는지 드러내고 있다. 영화는 현대 사회에서 종교, 권력, 그리고 자유의 의미를 다시금 성찰하게 만든다. 우리는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스스로 만든 신념 체계와 규율에 갇혀버리고, 그 안에서 안도감을 찾으려는 인간의 본성을 목도하게 된다.



<R.M.F. 가 거닐고 있다> - 사랑


<R.M.F. 가 거닐고 있다>는 실종된 아내 리즈가 돌아온 후, 그녀가 진짜 리즈가 아니라는 의심을 품은 남편 다니엘의 이야기를 다룬다. 다니엘은 이 의심으로 인해 점점 더 기괴한 행동을 요구하게 되며, 자신의 확신이 틀렸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심각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 에피소드는 인간의 불안과 욕망이 어떻게 망상과 집착을 만들어내는지를 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의 결말은 마치 다니엘의 믿음이 확실한 것처럼 보여주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앞에서도 암시했듯이, 그릇된 신념과 불안정한 자기 확신이 근거 없는 망상임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수차례 등장한다. 다니엘은 리즈가 실종 당시 부상을 입고 '개의 세상'에서 겪은 일들로 인해 전과 다른 행보를 보였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망상의 나래를 펼쳐간다. 심지어는 리즈가 말했던 '개의 세상'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다니엘의 말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리즈가 겪었던 '개의 세상'은 인간 세상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인간의 위치에 개가, 개의 위치에 인간이 놓여 있는 세상이다. 그곳에서는 인간들과는 다르게 개들이 인간들을 잘 돌보아 주고 인간들은 개에 종속되어 있다. 더 깊이 있는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리즈에게 그 상황이 인상 깊었고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으로 다가온 것 같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개의 세상에 대한 에피소드가 깊이 있게 다뤄졌다면 더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에피소드가 인간과 개 사이의 권력 역학을 더 깊이 탐구하고, 개의 시각에서 본 인간의 삶을 보다 상세히 그렸다면, 영화의 기괴함과 상징성을 더욱 부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니엘의 망상과 리즈가 겪은 '개의 세상' 사이의 대조가 더 뚜렷하게 드러나면서, 관객이 느끼는 불안과 혼란이 더욱 강렬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 에피소드가 다른 두 이야기와의 연결성과 맥락이 부족해 보이며, 영화 전체의 흐름 속에서 다소 아쉬운 느낌이다.


<R.M.F. 가 거닐고 있다>는 3편의 영화 중 가장 흥미로웠고, 기괴함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에피소드였다. 이 에피소드는 사소한 의심이 확신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극적으로 묘사하며, 그 확신이 어떻게 근거 없는 망상으로 변모하는지를 깊이 있게 드러낸다. 영화는 인간이 자신의 불안과 욕망을 어떻게 외부로 투사하고 비현실적인 믿음에 집착하게 되는지를 경고하며, 그 결과로 파멸을 초래할 수 있음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믿음이 어떻게 무너지고, 인간의 불안과 욕망이 합쳐져 만들어내는 망상과 집착을 섬뜩하게 그려내면서 그 잘못됨이 올바름으로 '규정'된다면 어떤 끔찍한 결과를 맞이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R.M.F. 가 샌드위치를 먹는다> - 종교


확고한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믿음을 압도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숨기고 사회적 인정과 안정감을 추구하기에 그들이 가진 신념이 사실보다 더 강력하게 자리 잡는다. 영화에서는 믿음에 대한 무수한 근거가 실제로는 허상에 불과하지만 왜 사람들이 그 믿음에 집착하게 되는지를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갈망이 그 믿음의 집착을 형성한다. 사람들은 불확실한 세상에서 안정감을 찾고자 하며 믿음은 그들에게 일종의 확실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때로 현실과 동떨어진 허상을 기반으로 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는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사이비 종교 지도자가 신도들의 불안과 욕망을 이용하여 그릇된 믿음을 주입하고, 이를 통해 그들을 통제하고 착취한다. 사이비 종교가 사회에 스며들고 그 사상이 주입되었을 경우 잘못된 이념이나 가치관을 확산시키고, 이를 통해 사회 전체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삶의 불확실성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맹목적으로 지도자를 믿고 따른다. 사회 구성원들이 비판적 사고 없이 특정 이념이나 지도자를 맹신하게 된다면, 사회 전체가 잘못된 길로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믿음은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닌 자신을 향해야 하며 자신이 바란대로 '다'이루어질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R.M.F. 가 샌드위치를 먹는다>는 맹목적인 믿음과 그릇된 신념이 어떻게 개인을 파멸로 이끄는지를 보여준다. 믿음이 어떻게 사람을 이끄는지 그리고 그 믿음이 어떻게 파멸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집단 광기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사이비 종교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의 나약함과 그릇된 신념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개인의 이야기로 그쳤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사회 또한 붕괴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며 깨어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해준다. 결국 이 영화는 집단적인 신념과 사이비 종교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개인과 사회 모두가 비판적 사고와 깨어 있는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특유의 불편함을 극대화시키는 연출과 더불어 배우들의 열연은 이 영화를 더욱 볼 가치가 있게 만든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억압된 욕망을 예리하게 파고든다. 누군가의 머리에서 막 뽑아낸 생각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아 혼란스럽긴 하지만 흥미로우면서도 기괴하다. 우화를 영화에 담아낸 듯 구원과 믿음에 대한 속임수를 큰 주제로 잡아 크게 종교가 아니더라도 사람에 대한 무조건인 믿음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믿음은 때로는 구원을 약속하지만 그 속에 감춰진 억압과 기만은 더 큰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러한 이중성을 날카롭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관객에게 믿음의 본질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게 만든다. 인간이 마주하지 않으려 했던 것들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불쾌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강렬한 믿음이 자기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듯이 우리는 끊임없이 영화 속의 에피소드를 반복하고 있다. 타인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자신의 환상을 타인에게 주입하고, 또 쉽게 인생의 구간을 지나치려 한다. 변화를 두려워하면서도 편안함을 추구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찾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스스로 만든 족쇄에 갇혀 있는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삶에 대한 실험은 어떤 결과를 낼지 궁금해진다. 여러 시도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지만 배우들을 마리오네트처럼 이용하고, 또 학대한다는 비판을 벗지는 못했다. 영화 속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상황들이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를 보는 게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감독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다. 모든 것을 보여주고 그 적나라한 불편함을 통해 세상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같다. 나쁜 것들은 언제나 존재하니 영화에서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 같다. 


이 노골적이면서도 섬세한 묘사는 어떤 방향으로든 새어 나오는 불쾌한 감정들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세상에 비하면 미약하기 짝이 없는 육체가 바들거리며 두려움을 맞이하고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해 역할을 바꿔가며 움직이고 있는 배우들의 모습을 통해 더욱 그 감정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든다. 그 수많은 가면은 직접적이면서도 짜인 판에 갇힌 듯한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영화 속에 등장한 이야기들이 모든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정체성을 위한 강박'을 어떤 식으로 느끼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였다.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는 지극히 욕망에 충실하고 자유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몸짓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지극히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일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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