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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드'가 아닌 '해피엔딩'을 향해 나아가다.

영화 <해피엔드> 리뷰

by 민드레

우리가 살아갈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최첨단 도시에 자유롭고 풍요로울 이상적인 삶. 하지만 미래가 현재와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 한편으로는 절망스럽다.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내기 바쁜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것이 없는 현실이 미래에도 계속 이어진다면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네오 소라 감독이 연출한 <해피엔드>는 2025년 4월 30일 개봉한 영화로, 제81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오리종티 부문에 프리미어 상영 되었다. 이 영화는 30년 뒤의 일본을 배경으로 기술 발전 속 인간성의 붕괴를 섬세하게 포착한 이다. 기술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고, 사회는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바뀌며 겉보기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지만, 그 속에서 인간은 점점 더 고립되고 상실감과 단절로 인해 팽배한 허무주의의 늪에 빠졌다. <해피엔드>가 그려낸 세상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혐오의 시대라고 할 만큼 혐오와 차별은 전 세계에 퍼져 점점 일상으로 굳어지고 있다. 그것이 더 이상 당연한 '정의'로 굳어지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미래세대이자 현재세대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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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제잉 음악을 즐기고, 또 좋아하는 고등학생 유타와 코우는 친구들과 함께 동아리방에서 자유로운 밤을 보낸다. 그러나 유타가 교장을 골려주기 위해 장난 삼아 교장의 고급차량을 세로로 세워버리는 장난을 친다. 다음 날, 지진이 발생해 차량이 더욱 크게 파손되고 이에 분노한 교장이 안전을 이유로 AI 감시 시스템을 도입하게 된다. 학교 곳곳의 카메라는 학생들을 감시하고 행동을 추적하며 벌점을 메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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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본은 유사시 내각의 힘을 강화하는 법을 통과시킨다. 대지진 발생 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지진이 발생하자 기다렸다는 듯 정부는 대국민 긴급사태조항을 선포한다. 일종의 비상계엄이다. 자세한 설명 없이 벌어진 일에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항의했고 이들은 반정부 폭동 시위자로 취급되어 모두 강제 연행된다. 한편, 학교에서는 교장이 교내 AI 감시 시스템을 도입하여 학생들의 행동을 추적한다. 안전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학생들을 감시하여 벌점을 메기고 징계하는 통제시스템이었다. 이 두 상황은 참으로 많이 닮아 있었고, 이 상황을 대처하는 방식도 사람들마다 달랐다. 찬성 시위와 반대 시위 또한 일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식하기 전까지는 그저 장면의 일부에 불과했다. 총리가 반대파가 던져 얼굴에 붙어버린 미역을 떼서 먹고, 교장이 학생이 거부한 도시락에서 떨어진 미역을 주워 먹는 부분이 겹쳐 보이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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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지진이 자주 발생하지만 일본 전역을 통째로 흔들 정도의 대지진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관동 대지진, 동일본대지진을 비롯해 심지어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지진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있다. 이 영화는 '지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사회적 지진으로 펼쳐내고 있다. 사회의 붕괴, 우정과 관계의 갈등과 같은 것들 말이다. 사회적 구조가 무너지며 인간관계와 우정 또한 흔들리기 시작한다. 사랑한다는 말로 인사를 나누며 영원한 관계를 지속하고 싶었던 이들에겐 무척이나 절망적인 일일 것이다. 같은 교복을 입고 함께 취미를 공유하는 친구들이지만 자신의 위치나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생각을 보여준다. 차별의 당사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이 나뉘고, 당사자임에도 행동하지 않는 사람과 당사자가 아님에도 목소리를 내는 사람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같은 문제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이 다른 만큼 균열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일어난다. 어떤 것도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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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다양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선택은 제한적이고 사람들은 좌와 우를 나누어 싸우고 그 상황에 질린 사람들은 무관심해졌다. 정치적 무관심은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득을 취하기 좋은 구조로 이끈다. 굳이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아도 자신을 지지하는 특정 지지층만을 위한 '정치'를 해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과 혐오를 선동하는 이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더욱 큰 차별과 불신을 양성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폭력에 익숙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방식으로 저항해야 우리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여 좀 더 나은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까.


이 영화를 보면서 지난해 발생했던 비상계엄령이 생각났다.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는 내용을 포함한 포고령이 발표되었다. 2024년 12월 3일 오후 10시 27분 비상계엄 선포했고 그 후, 약 6시간 만인 12월 4일 오전 4시 30분에 국회의원들이 모여 국무회의를 통해 계엄 해제를 의결했다. 이 일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였다. 이러한 일들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냉전시대를 기점으로 사라진 줄만 알았던 파시즘이 다시 번져나가고 있는 걸까. 이 영화의 현실이 실제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시즘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나타난 극단적인 전체주의적 배외적 정치 이념 또는 그 이념을 따르는 지배체제이다. 자유주의를 부정하고 폭력적인 방법에 의한 일당 독재를 주장하여 지배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한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철저한 국수주의ㆍ군국주의를 지향하여 민족 지상주의, 반공을 내세워 침략 정책을 주장한다. 우익의 형태가 급진화한 것을 파시즘이라고 부른다. ex) 이탈리아 파시즘, 나치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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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일본 전역의 통제 시스템보다는 학생들과 학교의 통제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일본의 사회 통념이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도 이미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사회의 전체적인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미 통제에 익숙해져 무감각해진 개인의 의식부터 깨워야 한다는 것이다. 큰 문제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던 학생들이 점차 자신들을 억압하는 시스템으로 인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대내외적으로 무언가가 달라지고 있음을 인지하는 계기가 찾아온다. 학생들은 변화를 위해 노력하지만,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과 '협의'의 어려움으로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찾아온다. 바깥에서 순응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이 시스템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직접적으로 차별을 겪지 않은 이들은 더더욱 일부의 통제는 필요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통제'의 배타성에 동의해서는 안된다.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찾아올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과연 일본 사회는 과거의 제국주의적 역사에 대해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을까? 지금도 다른 방식으로 차별을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닐까? 과거 일본은 일본 내의 조선인들을 천황의 식민지인으로 규정하여 지배했으며, 수탈과 착취를 이어갔다. 그 이후에도 일본은 일본에 정착한 조선인들을 '외국인등록법'을 통해 제도적 차별을 시행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조선인들조차 외국인으로 간주되어 법적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다. 이 법은 2012년 폐지되었고 '재류관리제도'로 통합되었지만, 차별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일본 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 있다고 한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유언비어에 휘말린 일본 민중들은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학살, 이른바 ‘간토 대학살’을 자행했다. 지진에 대한 두려움은 곧 소수자들 대한 배타주의로 확산되었고, 이는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혐오로 이어졌다. 위기 상황에서 소수자를 향한 배타적 의심과 공격성은 일본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영화에서는 재일한국인의 거소증 검사와 코우 어머니의 식당에는 비(非) 국민이라는 낙서가 새겨진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곧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네오 소라 감독 역시 “일본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 왔다고 말한다. 영화는 주인공을 재일 한국인으로 설정하여 "미래를 보는 허무주의와 낙관주의 사이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재일한국인이라는 인물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포기하는 세대를 포기하지 말아야지"라는 말처럼 다양한 재료가 어우러진 김밥을 나누어준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정체성과 배경을 지닌 이들이 통합해 가는 과정을 거친다. 지역이나 피부색으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공동체로서 개별성을 존중하며 균형을 이루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다름'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미래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려면 문제를 인식하고, 반성하며 반복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된다는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고,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권력자의 양심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게 속상해."라는 말처럼 완전히 해결된 것은 없지만 여전히 해결의 여지가 남아있으며 변화할 수 있는 희망을 나타낸다. 이 영화의 우정은 '해피'로 끝났고 세상은 '엔드'로 마무리 지어졌지만 어떤 결말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는 우리들의 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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