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치광이 피에로> 리뷰
무의식의 잔재를 영화로 표현한다면 바로 이런 영화를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답답함과 스크린 위에 무수히 펼쳐지는 무의미한 허상은 기묘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감각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영화는 바로, 장 뤽 고다르 감독의 1965년 연출작 <미치광이 피에로>다. 라이어널 화이트의 소설 <강박관념>이 기반이지만 원작에서 벗어난 각색으로 그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그려냈다.
페르디낭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 와이프와 함께 참석한 파티에서 엉망으로 만든 뒤, 전 연인이었던 마리안과 재회한다. 그 후, 마리안의 아파트에서 시체를 발견한 후 함께 도망치게 된다. 정해진 목적지 없이 남쪽으로 향하는 이들의 여정은 자유롭지만 동시에 위태롭기까지 하다.
페르디낭은 사회의 위선과 부르주아적인 삶에 권태를 느꼈다. 마리안느는 위험한 상황에 연루되면서 페르디낭과 함께 떠나게 된다. 그 이후, 모든 것이 충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했고 이들은 우연이라는 명목으로 불륜, 살인, 절도를 저지른다. 하지만 일말의 죄책감이나 반성은 없어 보인다. 그것이 반복될수록 망설임과 죄책감은 점차 사라지며 태연하게 범행을 계획하는 모습이다.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나는 행위였지만 그것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이라도 한 듯 무모할 정도로 자유분방하게 자신들의 욕망을 따르고 있다. '자유'를 갈망하기 위한 도피는 점점 이상과는 거리가 먼 '광기'로 변해갔고 감당할 수 없는 위험한 파국으로 그들을 끌어당겼다.
영화의 상황뿐만 아니라 이들의 관계도 파국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독하리만큼 맞지 않은 두 사람은 사소한 것부터가 너무 달랐다. 마리안느는 음악을 좋아하지만 페르디낭은 문학을 좋아하고, 페르디낭은 단어를 통해 생각을 표현하지만 마리안느는 느낌이 곧 생각이라 말한다. 함께할수록 행복하지만 파국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것과 바라는 것들 모두가 무의미하고 공허한 말장난처럼 일상이 반복된다. 사람의 정착 본능을 반영하듯 오랜 도피 생활은 서로를 지치게 만들었다. 마리안느의 자유롭고 예측 불가능한 영혼은 이 생활에 염증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이상적인 삶을 꿈꿀수록 현실과의 괴리감을 견딜 수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삶과 영화 속에서 겪는 혼란스러움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영화는 전쟁 같은 것이다. 또한 사랑이고 증오이며 행동이고 폭력이며 죽음이다. 한마디로 감정이다.
극 중, 마리안느는 페르디낭을 피에로라고 부른다. 하지만 페르디낭은 자신의 이름은 피에로가 아닌 '페르디낭'이라고 정정한다. 아랑곳하지 않고 피에로라고 지칭하는 모습은 두 사람 사이에 소통의 단절과 페르디낭의 정체성 혼란을 보여준다. "말은 비록 우리 매일의 삶에서 퇴화해 사라져도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의 그림자를 밝혀주기에 그 순수함만은 간직하게 된다"라는 문장처럼 언어의 본질적 가치와 '순수문학'에 대한 깊은 갈망을 지녔다. 문학적 이상을 삶에서 실현하고 싶어 하지만 예측불가능한 현실, 그것을 따라주지 않는 마리안느의 모습에서 좌절한다. 이러한 모습은 감독 자신의 예술적 지향점과 고민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고다르는 '누벨바그 운동'을 통해 기존의 영화 문법을 타파함과 동시에 프랑스 영화의 전통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새롭게 부흥하기를 바랐다. 이전과는 명백하게 다른 현대사회에서 순수한 예술을 지향하지만 현실에서는 말처럼 쉽지 않은 괴리감을 페르디낭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색채를 자유롭게 배치하여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조명, 물건, 글자 등을 나열해두고 있다.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프랑스 국기의 삼색 (파란색, 하얀색, 빨간색)에 한정하지 않고 노란색을 의도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는 프랑스가 본디 의미했던 고유의 가치들이 퇴색되고 다른 것들이 마구 쏟아지는 혼란스러움을 반영하고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조차도 모르는 현실, 그리고 관습적인 질서와 조화에 이미 균열이 생겼음을 색채의 배치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노란색은 밝고 활기찬 에너지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광기, 신경과민, 불안정함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다. '자유'와도 맞닿아있지만 충동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그 상황에서는 '파국'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색깔인 것이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진 무정부 상태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장치다.
극 중, 가장 불편하고 신경 쓰였던 장면이 있다. 마르안느와 페르디낭이 서로 미군과 베트콩군의 분장을 하고 연극을 하는데, 마리안느가 노란색 얼굴 분장과 우스꽝스러운 행동과 말투를 하는 그 장면이다. 당시 격화되던 베트남 전쟁과 미국의 개입을 비판하고 풍자하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미군과 미국의 전쟁 수행 방식을 조롱하는 장치로 해석될 수 있지만 전형적인 인종차별 장면이다. 인종에 대한 이해도 존중도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양인들이 동양인을 바라보는 피상적이고 왜곡된 시선으로 그려내었다는 점이다.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와는 별개로 전형적인 인종차별적 장면이다. 서양인이 바라보는 동양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인종적 희화화로 그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나 배경에 불과하게 소비됐다.
<미치광이 피에로>의 실험적인 연출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관습을 깨는 편집, 예측 불가능한 카메라 워크, 사운드 사용 그리고 제4의 벽 깨기와 같은 기법들을 통해서다. 다양한 시도는 서로 맞물려 불협화음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이는 인물들의 불안과 감정의 동요를 극대화한다. 내면의 혼돈과 무질서함은 영화의 기법,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 내용이다. 무엇보다 '제4의 벽 깨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현실과 영화 사이의 경계가 더욱 허물어지게끔 만든다. 영화 속의 인물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응시하며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넨다. 두 사람 사이의 소통 부재가 얼마나 깊어져가는지를 보여주며 외로움을 반영하기도 한다. 영화적 허구성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지만 더불어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닌 이들의 여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를 시험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했던 고다르의 실험이었다. 어지럽고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도 있었지만 기존의 형식을 거부하고 의도적 장치를 통해 관계의 혼란, 불안감 그리고 자유에 대한 복잡한 이면을 독창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