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행잉록에서의 소풍> 리뷰
피터 위어 감독의 1975년 작품 <행잉록에서의 소풍>은 조앤 린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소피아 코폴라의 <처녀 자살 소동>과 데이비드 린치의 <트윈 픽스>와 같은 영화들에게 영감을 준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00년, 애플야드 대학 학생들은 행잉 록으로 소풍을 떠난다. 미란다, 마리온, 이르마, 에디스는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뒷 산을 산책한다. 바위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던 이들 중 미란다, 마리온, 이르마는 어디론가로 향하고 에디스는 친구들을 만류하다 공포에 질려 홀로 산 아래로 내려온다. 수학교사인 맥그로 또한 사라졌다는 소식에 학교는 발칵 뒤집히고 학부모들의 항의가 잇따른다. 에디스는 무사히 돌아왔지만 선생님을 보았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실종된 네 사람을 찾기 위해 지속적으로 수색이 이루어지지만 그들은 끝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실종되었던 네 사람 중 이르마가 무사히 돌아온다. 머리에 상처를 입고 코르셋이 없어진 상태였지만 지나치게 멀쩡해 보였다. 그러나 아직 이르마를 제외한 미란다, 마리온 그리고 맥그로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안 그래도 기자들의 압박과 학부모들의 거센 항의가 이어지던 가운데, 이르마의 귀환은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물론 정상적인 반응이라면 이르마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껴야 하지만 교장선생님은 현실적인 부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학부모들의 항의로 인해 학생들이 다음 학기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것과 학비를 밀린 학생들이 있다는 것이 그녀에겐 사라진 학생들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학교의 재정 압박을 해소하기 위해 사라를 내보내기로 결심한다. 더 이상 후원자가 그녀의 학비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 좋은 결과를 불러올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일을 강행했다.
사라는 고아원에서 버티에게 의지하며 지냈지만 학교로 오면서 그와는 이별하게 된다. 사라에게 있어서 버티는 정서적인 버팀목이었기에 항상 그리워하며 재회하고 싶어 했다. 이곳에서 마리안과 각별한 사이였지만 마리안이 사라진 이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심지어는 마리안과 함께해서 소중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쫓기듯 나오게 된다. 소풍을 나섰더라면, 그래서 버티를 만났더라면 그녀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까?
'행잉록(Hanging Rock)'은 호주 빅토리아주 중부에 있는 화산지형이다. 수만 년 동안 행잉록은 워론 제리(Wurundjeri), 타웅우롱(Taungurong), 드나드자 워룽(Djadja Wurrung) 부족에게 신성한 부족의 의식 장소였다. 하지만 영국의 식민지화로 인해 천연두와 같은 질병과 학살로 인해 많은 수가 사망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힐스빌의 코랜더크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 되었다고 한다. 유럽 정착민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데 쓰인 법적 원칙은 "주인 없는 땅"을 의미하는 테라 눌리우스(Terra Nullius)이다. 문명화된 민족이 없기 때문에 토지 소유권을 가질 수 없는 무인도나 다름없다는 논리로 식민지배를 정당화했다.
이 영화는 원주민들의 억압과 여학생들의 실종이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듯 이야기를 전개하여 자연스럽게 두 내용을 이어간다. 영화에서는 직접적으로 원주민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소녀들이 신발과 양말을 벗어 맨발로 어디론가로 향하는 모습은 원주민을 연상케 한다. 또한, 어떤 시대 상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코르셋이나 행동 억제를 통해 일상 속에서 억압을 경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원주민의 존재를 지우려는 시도와 소녀들의 욕망, 본능,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의 폭력성을 보여준다. 취약하거나 통제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통제와 억압을 가하는 모습이 식민주의와 가부장제는 서로 닮아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가치관은 녹아들지 못했음을, 실패했음을 암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연극처럼 저 멀리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시점으로 그려진다.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고 흐릿흐릿한 꿈의 세계를 거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 사건의 결과와 실체보다는 그 사건을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에 집중을 하고 있다. ‘소멸’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 또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끊임없는 이별과 상실은 사람에게 상처를 안기기도 하지만 성장할 수 있게 돕기도 한다. 한 사람을 버티게 만들 기둥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음을 '사라'를 통해 보여준다. 전혀 모르는 사이에 대한 '집착' 혹은 '걱정'은 한 소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그 세상에 갈 수도 손에 닿을 수도 없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소녀들은 행잉록에서 자신을 분리하듯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목적 없이 살아간다는 게 놀라워. 설령 목적이 있다고 해도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기능을 수행할 뿐이야."라고 말한다. 소녀들은 어딘가에 이끌린 듯 바위 위로 올라가 신발과 스타킹을 벗고 맨발로 어디론가 향한다. 그 너머의 세상은 시간이 멈추고 그들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신성하거나 숭고한 힘에 이끌린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떤 결말에도 그런 정보는 주어지지 않는다. 단지 추측할 뿐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부연 설명이 있어야만 이해될 수 있어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말로는 도무지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이 마구 맴돌아 궁금증을 유발한다.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다방면으로 소녀들의 실종을 해석해 볼 수 있다. 공통적으로 그들의 실종은 억압적인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용기이자, 문명화된 세계 너머의 본질적인 자유를 향한 열망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미지의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곳에 가는 것뿐만 아니라, 그곳의 신비로운 힘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고, 사회적 규범과 합리성을 벗어던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1. 신비로운 힘이 소녀들을 흡수했다?
소녀들은 신비로운 힘에 의해 어딘가로 이끌려 사라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몽환적인 분위기와 시간의 왜곡, 그리고 설명되지 않는 실종의 원인에서 추측해 볼 수 있다.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는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 힘이 소녀들을 흡수했으며 어떤 조건에 해당되지 않으면 이르마처럼 돌려보낼 수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 자연의 보복 또는 대가를 치르는 제물로 바쳐진 것이다?
바위에 누워있는 모습, 금기된 곳에 인간이 찾아간 대가로서 제물로서 받쳐진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바위에 누워 있는 모습은 인간이 침범해서는 안 될 신성한 영역에 들어간 대가로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다. 이들은 자연의 분노, 혹은 식민주의가 앗아간 생명에 대한 응보의 개념이다. 신성한 공간이 인간의 탐욕과 억압적 문명에 대한 응징의 장소로 작용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3. 사회적 억압으로의 해방?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들은 코르셋, 스타킹, 단단한 신발 등으로 몸을 조이고 가려야 했다. 마찬가지로 식민지의 여성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기에 그 규정을 따라야 했다. 잘록한 허리, 작고 단정한 발은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여겨졌고, 이는 곧 사회가 강요하는 순응과 통제의 상징이다. 그런 의복을 벗는 것은 그러한 억압에 대항하는 저항의 행위다. 문명화된 사회가 강요한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주체적인 결단인 것이다.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나 억압이 사라진 이상적인 세계로 나아갔을 것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억압받지 않으며 본능과 자유가 허용된 세계로 떠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차원으로 나아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거대한 힘 앞에 선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 세계를 느끼고 해석하려는 인간의 본능을 보여주고 있다. '실종'을 통해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또 다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한 시작이었다. 다시 ‘시작’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구조를 가지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설명되지 않는 것들로 덕지덕지 붙어 있는 영화는 ‘명확한 이해’보다는 ‘느낌’과 ‘감각’으로 느낄 것을 유도한다. 피터 위어 감독은 미스터리를 의도적으로 해결하지 않은 채 남겨두어, 관객들이 스스로 상상하고 해석하도록 만든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짚어내기는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