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리뷰
이와이 슌지 감독을 떠올리면 대부분 청아하고 서정적인 영상미가 돋보이는 영화들이 먼저 생각난다. <러브레터>, <4월 이야기>처럼 '화이트 이와이'로 분류되는 작품들이 그렇다. 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이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있다. 거칠고 강렬한 분위기를 풍기는 '블랙 이와이'의 대표작품에는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 있다. 동일한 감독의 연출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상반되고도 강렬한 작품들을 통해 그의 다채로운 세계관을 마주할 수 있다. 1996년 작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는 오는 2025년 7월 16일 다시 극장에서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경제 붕괴 이후 일본의 화폐인 '엔 ¥'이 세계의 주요 통화가 된 미래를 비춘다. 도시는 이민자들이 넘쳐나 '골드러시'를 방불케 했고 그들이 사는 빈민가 '옌타운'이 형성된다. 일본인들은 이방인들을 경멸하며 그들을 옌타운이라 불렀고 그 말은 그들이 사는 공간과도 이름이 같았다. 한편, 어머니를 잃은 소녀는 이름도 없이 사창가에 맡겨진다. 그렇게 떠돌던 중 상하이 출신의 창녀이자 가수인 글리코에게 거두어져 함께 살아가게 된다. 그곳에서 소녀는 아게하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 없고 죽음조차도 존엄하지 않은 근미래. 영화 속 일본과 옌타운은 겉으로는 철저히 구분된 공간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일종의 낙인에 가깝다. 국적과 계급으로 선을 긋고 이방인이라 칭하며 차이를 두지만 돈 앞에서는 이들 모두 같은 본성을 드러낸다. 그곳에서는 오로지 돈으로 시작되고 돈으로 끝나는 욕망만이 이름을 남기고 있다. 이민자들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금의 환향하는 꿈같은 희망을 바라며 이곳으로 오게 되지만 이들은 쉽게 돌아갈 수 없었다. 돈을 가진 만큼 해야 하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늘었기에 돈의 위선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허덕일 수밖에 없는 지옥이었다. 소비하고 착취하고 망가뜨리는 이 폭력적인 가정에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상과는 다른 현실이 펼쳐지고 존엄스러워야 할 죽음조차 의미 있게 맞이할 수 없다. 가난하고 허무하게 불쑥 끊겨버리는 생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공간에서 누군가는 '해피엔딩'을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하고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엄마를 잃은 소녀는 이름도 없이 세상에 던져진다. 누군가 자신의 몫을 빼앗아가도 목소리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의기소침해져 있다. 그렇게 떠맡겨진 곳에서 글리코를 만나게 된다. 글리코는 이 이름 없는 소녀에게 아게하 (アゲハ), 호랑나비라는 뜻의 이름을 지어준다. 자신의 가슴에 새겨진 나비 문신을 보여주며 아게하에겐 애벌레 그림을 그려준다. 글리코와 아게하는 형용할 수 없는 관계로 발전한다. 이곳에서도 저것에서도 속하지 않았던 아게하에게 존재를 부여해 주고 날 수 있음을 속삭이며 착취와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보호해주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비는 희망이자 꿈 그리고 허망함을 상징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 희망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도 함께 보여준다. 화려한 문양의 나비는 아름답지만 속은 텅 비어 있다. 날아오를 수 없는 현실의 한계, 세상의 벽에 부딪혀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하는 허황된 것으로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문신은 몸에 생명을 키우는 거야. 성격도 바뀌게 하고 운명도 바꾸어줘. 그냥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라는 말을 통해 아게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애벌레를 키워내고 조금씩 나비가 되어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영화에서 여성들은 욕망과 폭력의 온상에 놓여 있다. 특히 여성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서사적 목소리는 자주 차단되거나 주변화된다. 글리코는 창녀이자 가수라는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몸’과 ‘목소리’ 모두 상품화된다.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하지만 '창녀'라는 이름아래 진짜 목소리는 외면당하고 왜곡되기 십상이다. 생계를 위해 몸을 팔기도 하지만 그녀가 어떤 일생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매춘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닌 여성의 몸을 소비하고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극단적 현실이자 폭력적 체제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여성들은 주체성을 상실한 채 거래의 대상이 되며 ‘존재’가 아닌 ‘상품’으로 취급된다. 아게하는 이름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다.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나이지만 돈을 준다면 취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어린 소녀조차도 ‘상품’이 되는 극단적인 현실을 보여준다. 글리코와 아게하 사이에 형성되는 유사 모녀 관계는 잠시나마 보호와 위안을 주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주지는 못한다. 이민자이자 주변인이라는 이중의 타자성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하지만 날지 못한 나비들의 잔해가 모여 또 다른 형태의 나비를 만들어내어 서로를 감싼다.
조용한 분위기이지만 그 평화로움은 오히려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느껴진다. 인생의 고점과 하점을 보여주면서 순식간에 사람들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암울함에 매몰된 인간들은 절망에 허덕여 일어날 의지조차 내지 못할 지경에 놓인다. 범죄가 당연시되면서 마약과 매춘이 공공연하게 성행하고 아이들조차도 범죄에 취약해지며 상품으로 취급된다. 법은 무기력하고, 도덕은 사라졌고, 죄의식이나 인간성은 무의미해진 지 오래였다. 절망의 끝에 놓인 사람들은 마약에 의지한다. 잠시라도 현실을 잊게 만드는 수단이지만 마약은 위로가 아닌 파멸을 부른다. 정신은 흐려지고 몸은 망가지며 결국 인간으로서의 존엄마저 무너지는 죽음을 맞이하게 만든다. 죽음조차도 존엄하지 않다.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리고 그 죽음조차 존엄을 보장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건 돈이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도 그 냉혹한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씁쓸했다.
'My Way' 카세트테이프는 영화의 중심 소재이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평범한 테이프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위조지폐를 만들 수 있는 데이터가 숨겨져 있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이 테이프를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한때는 음악 테이프로 사용되었을지 모를 테이프는 "내 방식대로", "나의 길" 또는 "내가 걸어온 길"이라는 의미가 아닌 범죄의 매개체가 된다. 위조지폐는 그 자체로 범죄행위지만 도구로 전락해 버린 이들에게는 유일한 생존 방식이 된다. 돈으로는 뭐든 할 수 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고 사랑도 마음껏 할 수 있으며 자유를 살 수 있는 도구다. 돈이 없어서 장례식을 하지 못했을 정도의 가난을 겪었기에 테이프만 있다면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믿음은 환상에 가깝다. 망가진 현실 안에서는 누구든 돈에 끌려다닐 수 있으며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도 모른 채 파멸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페이훙의 장례식 장면에서 어렵게 모은 돈을 불태우는 장면은 그 굴레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저항처럼 보이지만 모순적이게도 불타는 돈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는 또 다른 욕망의 잿더미처럼 보인다. 그렇게 'My Way'라는 이름의 테이프는 또다시 재생되며 다시 같은 욕망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무너뜨릴 것이다. 자유롭게 느껴졌던 장면이었지만 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슬픈 마무리였다.
영화는 지독하게 어두운 분위기의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희망은커녕,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현실은 무겁고 잔혹하며 인간이 발을 딛고 설 땅조차 어둠으로 가득 찬다. 그러나 주변이 온통 밑바닥에 가까운 삶이기에 아주 작은 빛조차 기적처럼 느껴진다. 마치 감각이 마비된 듯 이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기만 한다면 해피엔딩이라 여겨질 만큼의 환각 같은 희망이었다. 그래서 지나칠 만큼 구체적인 현실묘사는 오히려 이 세계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게 느껴지게 만든다. 인간에게 떼놓을 수 없는 '돈'을 통해 욕망과 결코 멀어질 수 없는 과거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한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와 겹쳐지며 오싹해진다.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할 수 없고 기본적인 것들이 전부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날갯짓하며 날아오르는 이들의 이야기다. 작지만 단단한 희망을 품고 있는 그들의 날갯짓을 진심으로 응원해주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