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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가 있는 곳에 소년도 있었다.

영화 <케스> 리뷰

by 민드레


1969년 켄 로치감독의 <케스>는 배리 하인즈의 소설 『A Kestrel for a Knave』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당시 영국의 노동 계급의 가혹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평단의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1970년 카를로비바리 국제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에서 두 개 부문을 석권하는 영예를 안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줄거리


영국 남부 요크셔의 빈곤한 탄광촌의 15세 소년 빌리 캐스퍼. 그는 집을 떠난 아버지, 어머니의 방임과 이복형의 학대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어느 날 빌리는 집 근처의 오래된 성곽 터에서 황조롱이 둥지를 발견하여, 새끼를 데려와 훈련을 시키게 된다. 새의 이름을 케스. 빌리는 생애 처음으로 열정적인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데...



노동하는 아이들, 방치하는 어른들


어머니 캐스퍼는 고된 노동에 지쳐있다. 빌리에게 신경 쓸 겨를조차 없고 감기에 걸릴 수 있다며 샤워도 하지 못하게 한다. 어차피 곧 졸업할 거라며 체육복조차 사주지 않아 체육교사에게 혼난다. 또, 매일 새벽 빌리는 신문 배달을 하며 돈을 벌지만 그 돈마저 '벌'을 명목으로 어머니가 가져가 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특히 재혼을 꿈꾸는 어머니가 남자를 만나는 것이 소문이 나면서 빌리는 아이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이복형 쥬드는 광부로 일하며 쌓인 스트레스를 빌리에게 분출한다. 신체적, 언어적 폭력을 가해도 엄마가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한다.


학교에서도 빌리는 문제아로 낙인찍혀 교사와 동급생들에게도 조롱과 폭력을 당하지만 무관심에 방치된다. 매일 새벽, 신문 배달을 하고 학교에 가니 학업에 집중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런 빌리의 사정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온통 불친절한 어른들이 빌리를 작정이라도 한 듯 괴롭힌다. 물론 빌리가 과거에 저지른 일들이 큰 문제가 된다. 하지만 그것이 빌리를 학대하고 방임하는 것에 정당화될 수는 없다. 잘못은 바로잡되, 아이의 삶을 들여다보고 행동의 이유를 물어보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잘못된 교육방식이 아이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었다.


빌리는 무엇을 진득하게 하거나 흥미를 갖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하지만 동물들을 기르는 일에는 꽤 소질이 있어 보였다. 빌리에게 유일한 관심을 보였던 교사 파딩과의 대화 속에서 알 수 있었다. 그는 케스를 훈련시키기 위해 관련 서적을 찾아보려 한다. 하지만 도서관에서는 회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책을 볼 수 없었고, 부모의 허락이 없는 경우에는 회원이 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빌리는 중고서점에 가 책을 훔치게 된다. 그는 꾸준히 매를 훈련시키며 이전에는 갖지 못했던 '열정'을 발휘한다.



제대로 교육받을 수 없는 아이들, 그것을 방관하는 사회


영국의 삼자 간 교육시스템은 학생들의 학업 능력에 따라 여러 유형의 학교로 나누었다. 문법학교, 중등근대학교, 기술학교. 11+ 시험을 통해 학생을 선발함으로써 학생의 미래가 결정되었다. 문법학교는 우수 학생 중심의 엘리트 교육 기관이었다. 문법 학교를 졸업하면 안전하고 고임금의 직업을 가질 수 있는 화이트칼라가 될 수 있었다. 중등근대학교는 대다수의 학생들을 수용했고, 실패자를 위한 학교라는 낙인이 찍혀있었다. 산술, 목공, 요리 등 실용 기술을 익힐 수 있으며 영화 속에서는 비숙련 육체노동이나 광부를 직업으로 삼게 된다. 기술학교는 과학자나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해 존재했지만, 숫자가 매우 적어 현실적으로는 문법학교와 중등근대학교 체제로 운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개인의 적성이나 환경은 고려하지 않은 채 성적으로만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는 교육 시스템은 교육 기회의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소득 수준에 따른 교육 불평등이 계층의 불평등을 고착화시켰다. 평등을 위해 존재해야 할 교육이 오히려 그 불균형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능력 중심이라는 이상은 겉보기에만 공정했을 뿐 특정 계층의 잠재력을 짓밟고 기회를 차단했던 것이다. 빌리와 같은 아이들을 제대로 포용하지 못하는 교육이 과연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에도 큰 목적이 있지만 한 사람의 가능성을 존중하고,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교육은 그 자체로 실패다.



열정조차 허락되지 않는 사회에서 케스의 존재란


영화 속에서는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동 노동'은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 부모들의 임금이 낮고 불안정했기에 자녀들도 어린 나이부터 생계를 위해 직업을 가지는 것은 너무 당연하게 여겨졌다. 영화 속 대사 중에서 체육복을 가져오지 않은 빌리에게 체육교사가 "돈이 부족하면 네가 직접 벌어서라도 사 왔어야지"라고 타박을 주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 삭막한 현실 속에서 케스는 빌리에게 유일한 위한이 도피처였다. 케스는 길들일 수 없고, 길들여져서도 안 되는 존재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빌리에게는 유일하게 통제가 되는 존재였다. 자신에게 다가오고, 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주었던 케스라는 존재는 자유 그 자체였다. 그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열정을 쏟을 수 있었다. <케스>에서는 한 아이의 삶을 통해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게 만든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성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어른들의 가치관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아이를 고립시키고 무시해도 괜찮은 걸까? 교육의 본질과 인간 존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가족의 유대감도, 사회의 보호도,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아이는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게 될까. 이 영화는 아동 노동과 교육 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영국 사회에서 교육 제도 개선과 아동 권리에 대한 담론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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