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몽상가의 나흘밤> 리뷰
삶의 모호함은 눈에 드러나지 않아 어디로 발걸음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럴 때마다 멈춰 서서 무언가를 바라보며 생각과 고민을 거듭한다. 눈앞의 장면들, 그 속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통해 막연하고 모호한 감각들이 서서히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이렇게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 구체화시키고 스크린에 표현해 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감독이 있다. 바로 프랑스 영화의 거장, 로베르 브레송이다. 오는 5월부터 6월까지 CGV에서 프랑스 거장 감독의 영화 4편을 연이어 상영하는 기획전 ‘리마스터링 시리즈 기획전: 파격과 상상’이 열린다. 그 첫 번째 작품은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1971년작 <몽상가의 나흘밤>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야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제24회 칸 영화제 감독 주간 부문 초정작이자 제21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OCIC상 수상작이다. 2025년 5월 21일 재개봉하여 관객들과 다시 만난다.
늦은 밤의 파리. 자크는 거리를 걷던 중 퐁네프 다리에서 뛰어내리려 하는 여성 마르트를 구한다. 그녀를 설득해 자살을 막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난다. 두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르트는 어머니와 단칸방에 살며 하숙생과 사랑에 빠졌다. 그는 예일대에 합격하여 1년 뒤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귀국 후에도 연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실의에 빠진 마르트를 위해 자크는 대신 편지를 전해주기로 한다. 끝내 답장은 오지 않고, 마르트는 점차 자끄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던 네 번째 밤, 마르트는 자끄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두 사람은 키스한다. 함께 거리를 걷던 두 사람 앞에 마르트의 옛 연인이 나타났다.
마르트의 마음은 처음부터 그렇게 쉽게 열리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우선시하지 않는 그 남자에게 호감이 갈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반발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남자가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순식간에 빠져들었고 그를 길게, 깊게 마주하고 싶었다. 그를 믿었기에 이 약속이 지켜지지 못할 것이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만큼 배신감도 더 컸다.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것도 알지만 계속 걸음은 이곳을 향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돌릴 수 없는 마음의 형태는 어떻게 그렇게 견고한 걸까. 마르트는 실망감과 배신감으로 가득 찬 마음 한 켠의 ‘사랑’을 저버리지 못했다. 쉽지 않았던 만큼 깊어진 마음이라는 건 하루아침에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자크는 자신의 연인보다 훨씬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다. 그것을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마음을 보답하고 싶었고 그를 사랑하겠다고 다짐한 그 순간, 옛 연인이 나타나버렸다.
자크는 히치하이킹으로 차를 얻어 타 시골 마을에 들어선다. 그는 여유롭게 휘파람을 불며 풀밭을 누비고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무명의 화가로 틈틈이 녹음기에 세상의 소리, 자신의 몽상을 담아 작업실에서 그림에 표현해내곤 했다. 자신의 영감이나 예술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낯선 여자들과의 ‘가상‘ 만남을 통해 이야기를 상상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작품에 그대로 그려내는 작업을 했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마르트를 통해 전과는 다른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그는 하루 종일 그녀의 이름을 되뇌고, 그녀의 이름과 같은 글자들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곤 했다. 그것이 비록 완성되지 않은 사랑이라 할지라도 그 사랑의 몽우리는 자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마르트를 처음 만났을 땐, 설렘, 기대,이었고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상실, 절망, 이별의 감각을 느끼게 되었다. 몽상가의 나흘 밤은 그렇게 끝이나 버렸다.
영화의 타임라인은 첫 번째 밤부터 네 번째 밤으로 나뉘어있고 세부적으로는 마르트 자크의 이야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인물들의 내면을 더욱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더 보고 싶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영화는 실제 인물을 찍은 것처럼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이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상상해 보게 만드는 영화다. 그만큼 섬세한 내면이 잘 그려져 있었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장면 외에는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는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 생각나고, 이들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진다.
한 칸을 할애해서라도 꼭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스쳐 지나간 장면 중 하나이고, 자크가 느낀 소외감을 표현하는데 소모된 장면이지만 꼭 주목하고 싶었다.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을지는 몰라도 이 장면이야 말로 감독이 고민하는 예술과 존재에 대한 고뇌를 담고 있는 장면이 아닐까. 작품을 그리던 자크의 집에 자크의 미술 학교 동창이 찾아온다. 자크는 문을 열어주기 전, 더럽게 어질러진 집을 황급히 정리하고 자신의 작품은 안 보이게 세워둔다. 사람에게 선을 긋고, 자신의 작품을 판단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는 모습이 엿보인다. 동창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대뜸 "장인 정신은 죽었어"라고 말한다. 샤르댕의 브리오슈, 마네의 작약, 반고흐의 의자와 신발 모두 끝났다고 말을 이어간다. 그는 지금처럼 자연만을 그리는 예술이 아닌 화가와 개념이 조우하던 그 시대의 회귀를 바란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점이 작아질수록 그 점이 정의하는 세계는 더 커져. 점이 보이지 않는다면 부득이하게 점을 찾기 위해 모든 곳을 다 본다는 얘기지"라는 이 말이 그 시대의 미술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압축하여 보여준다. 이러한 과도기 속에서 예술의 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술의 열망은 사라지지 않지만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예술가들이 마주한 불확실성과 고독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감독은 이 영화로 '사랑'으로 대답을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