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우트> 리뷰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감정의 단어는 '의심'일 것이다. 누군가를 신뢰하고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정보 과잉의 시대에서 살면서 무엇이 사실인지 판별해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만큼 이 영화는 더욱 흥미롭고 소름끼칠정도의 전율을 가져다준다. 이 영화를 보게 되면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어떤 것에도 확신할 수 없게 되는 혼란에 허우적대게 될 것이다. 의심은 영화가 끝나도 현실에 끊임없이 맴돌며 불신의 씨앗을 키울 것이기 때문이다. 2008년 존 패트릭 샌리 감독의 연출작 <다우트>는 의심이라는 추상적인 주제를 명확하게 시각화하며 강렬한 경험을 선사한다. 특히 메릴 스트립과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의 연기는 이 영화의 백미로 손꼽힌다.
플린 신부가 성 니콜라스 학교에 부임한다. 그는 진보적이고 다정한 성격으로 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낡은 가치관을 가진 성당과 학교의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려 하지만 이러한 행보는 보수적이고 원칙주의를 고수하는 교장 알로이시스 수녀의 눈에는 못마땅하기만 하다. 한편, 성 니콜라스 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흑인 학생 도널드 밀러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한다. 그런 밀러에게 호의를 베푸는 건 오직 플린 신부뿐이다. 밀러의 담임인 제임스 수녀는 플린 신부가 밀러에게 베푸는 호의가 지나치다 느꼈고, 그들 사이의 미묘한 기류에 의구심을 품는다. 결국 제임스 수녀는 일로이시스 수녀에게 이러한 사실을 전하게 된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제임스 수녀의 말만을 증거로, 플린 신부의 뒤를 캐기 시작하는데...
알로이시스 수녀는 원칙주의자이다. 그녀는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고 신성한 영역에 불순한 것이 침범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강박적 일정도로 원칙과 기준을 준수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개개인의 자유로운 표현이나 개성보다는 공동체의 규범과 교회의 가르침에 순응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아이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보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색출해 내려는 감시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 공동체에서 소외된 이들이나 남다른 아픔을 가진 이들을 모두 포용하지 못했다. 그런 알로시우스 수녀에게 플린 신부는 교회의 전통을 흔들고 규율을 해이하게 만드는 '늑대'였던 것이다. "양의 탈을 쓴 늑대를 막아내는 게 내 의무예요"라는 말처럼 그를 어떻게 해서든 저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밀러가 어떤 힘든 일을 겪었고 아픔을 가지고 있는지는 그녀에게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진실' 자체보다는 자신의 '확신'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였다. 한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만들며 신의 뜻을 저버렸고 그 대가로 의심을 끝내 거두지 못하는 의심의 굴레에 갇히고 말았다.
플린 신부는 알로이시스 수녀와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그는 진보적인 유연한 사고를 지닌 신부로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다.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은 경직된 학교에 약간의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더불어 그의 설교는 희망과 표용의 메시지로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흑인이라는 이유로 따돌림당하는 도널드 밀러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주며 각별히 신경 써준다. 개인적인 고민과 부모님의 문제로 인해 혼란스럽고 마음이 지쳐있던 밀러에게 유일한 쉼터는 플린 신부였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 치명타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어떤 증거도 없지만 알로이시스 수녀의 도를 넘는 '의심'이 그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제임스 수녀는 그들을 중간에서 바라보는 사람으로서 가장 객관적이게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플린 신부의 다정하고 진보적인 모습에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플린 신부의 행동에 의문을 품기도 한다. 한편, 알로이시스 수녀가 명확한 증거 없이 지나치게 의심에 집착하는 모습 또한 그녀의 눈에는 불편하게 비친다. 사실이 아님에도 꾸며내고 지나친 모습에 의문을 제기한다. 당황스럽고 납득할 수 없지만 그녀는 선택할 수 없는 입장에 놓여있었다. 그럼에도 신중하게 두 사람의 입장을 바라보고 고뇌한다. 관객과도 같은 입장에 놓여있으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의심의 영역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쉽게 단정 짓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녀의 입장에 놓인다면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해 질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는 감독의 의도에 따라 몇 가지 지점을 의문이 들도록 배치하여 관객의 의심을 부추긴다. 특히 플린 신부의 잦은 전근과 마지막에 그가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체념하는 듯한 발언은 명확한 증거가 없음에도 그의 행적에 대한 의문이 들게 만든다. 5년 동안 세 번이나 교회를 옮겨 다녔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신부들에게 흔치 않은 경우이기에 과거 행적이 더욱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이러한 의심스러운 정황에도 불구하고 플린 신부의 죄의 유무를 명확히 밝히기보다는 사건을 덮으려 하며 승진까지 시켜준다. 이는 교회가 겉으로는 순수성과 원칙을 내세우지만, 내부적으로는 조직의 안정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불편한 진실을 덮는 데 급급한 이중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이러한 교회의 태도는 플린 신부의 무고함을 의심하게 만들고 혹은 교회의 부조리한 면을 부각한다. 특히 가톨릭 교회 내에서 오랜 기간 수많은 사제들이 어린아이들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조직적으로 은폐해 왔던 사실이 있는 만큼 이 부분에서도 '의심'이 들게 만들었다. 그 시대상 신부를 상대하고 이기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영화 <다우트>는 의심에서 시작하여 의심으로 끝나지만 끝내 그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명확한 답이나 확실한 증거보다는 모호한 정황만이 주어져 그것을 바탕으로 그 상황을 판단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눈으로 목격하지 않은 사실에 살을 더해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둔갑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부조리 앞에서 한 개인이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미디어의 세상, 정보 과잉의 시대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어야 할까. 어떤 판단을 쉽게 하기 힘들 만큼 '말'이라는 것이 참 무섭고 강력한 힘을 가졌기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고 역술한다. 근거 없는 소문과 편향된 정보가 사실인 것처럼 유포되는 일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이기 때문에 영화가 던지는 경고가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영화의 시작은 수녀의 의심에서부터 시작된다. 눈으로 목격하지 않은 사실을 추궁하고, 때론 거짓을 섞어가며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진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은 끔찍하다. 사실이 아님에도 끝나지 않는 의심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은 채 모두를 혼란에 빠뜨리며 이 상황을 끝내지 못한다는 것이 더욱 끔찍하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보였던 작은 소문이 '의심'이라는 씨앗이 되어 한없이 커지고, 결국 사실이 아닌 '의심'이 '확신'이 될 수 있다는 해를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펼친다. 영화의 이야기를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지만 그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기에 확신할 수도 없어 판단을 유보하게 된다. 어떤 의견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확신이 있어야 하지만, 과연 그 판단이 객관적인 사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물음표에서 시작된 영화는 '말'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훨씬 강하며, 한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성급한 판단은 끝없는 후회를 낳고, 사람들 간의 신뢰를 무너뜨려 악순환을 반복하게 만든다. 영화는 이 끝나지 않는 '의심'의 굴레를 통해 도리어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