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퀴어> 리뷰
『퀴어』는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2024년 작품으로, 각본은 저스틴 커리츠케스가 맡았으며 제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다. 2025년 6월 20일 개봉한 이 영화는 사랑을 갈망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욕망, 고독, 자기혐오가 교차하는 내면을 시각화시켜 사랑이라는 감정이 한 사람을 무너뜨리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1950년대 멕시코시티에 사는 윌리엄 리는 중년의 미국인 작가이다. 그는 늘 가는 게이 바, 십아호이에서 늘 새로운 상대를 찾는다. 젊고 아름다운 청년이 그의 목표. 그곳에서 젊고 아름다운 청년 유진 앨러튼을 만나게 된다.
사랑을 찾아 헤매던 리는 늘 육체적 관계에서 끝나는 만남에 매번 허탈함을 느낀다.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 관계의 반복에도 사랑을 멈출 수 없다. 요즘은 실패확률이 더 높다. 자신이 퀴어라는 편견으로 인해 진정한 사랑을 만나는데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평소와 같이 사람을 찾아 헤매던 어느 날, 한 남자와 눈이 마주치게 된다. 자신이 가는 곳마다 나타나 눈을 마주쳐오는 그 남자, 유진. 어느샌가부터 리는 유진이 자주 가는 곳을 찾아다니고 그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한다.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마음은 깊어져가고 유진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해주고 싶었지만 그는 원하지 않았다. 자립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유진은 좋은지 나쁜지 내색도 하지 않고 옅은 웃음을 띨 뿐이었다. 그런 애매모호함 속에 리의 애달픔만 더해져 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집착일지도 몰랐다. 텅 비었던 리의 마음에 어느새 유진이 가득 차버렸고 이미 헤어 나올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두 사람 사이의 묘한 기류는 이미 사랑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쌍방의 감정이 아니었다. 나이차이만큼이나 그들은 너무나 달랐고 무척이나 애매했다. 우선, 리는 자신이 퀴어라는 것을 인정했고 유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리가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노력할수록 유진은 더욱 알 수 없는 표정을 보였다. 그의 일부라도 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마음뿐만 아니라 자존심까지 던질 만큼 모든 내어주고 싶어진 것이다. 유진이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줄 수 있었다. 그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사랑이자 집착, 구원이자 파멸의 시작이었다. 남미 여행 중 전설적인 환각제 '야헤'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 텔레파시 의식 중에 드러났던 그 속마음만은 '사랑'에 가까웠지만, '리'의 마음만큼의 크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후, 유진은 떠나고 말았다. 리는 유진의 전부가 되고 싶었지만 유진은 그마저의 공간조차 내어주지 않는다. 그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심연의 외로움만큼은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화는 유진의 전갈 목걸이와 리의 부러진 갈비뼈라는 두 개의 상징을 반복적으로 클로즈업한다. 전갈은 자아방어와 강인함, 용기를 상징하지만, 부러진 갈비뼈는 불완전한 자아를 상징하며 이루어질 수 없는 그들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더 이상 돌아갈 곳도, 붙잡을 사람도 없는 리는 정말이지 추할 정도로 자신의 속마음을 전부 내보인다. 마음은 너덜너덜해질 만큼 망가졌고, 감정은 온전히 드러났다. 유진의 말 한마디, 무표정 속에서 드러나는 작은 표정 변화 하나에 휘둘린다. 그 하루가 좌지우지될 정도로 유진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웃기지 않은 상황에도 웃고, 유진을 궁금해하면서 계속 함께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것도 부담스러운 일이었을까. 그에게 닿고 싶은 마음으로 다가설수록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저 함께 있고 싶을 뿐인데, 그 마음조차도 짐이 되는 걸까. 겉은 뜨겁지만, 속은 지독하게 차가운 그 사랑은 끝내 완전해지지 못한 채 부유했다. 술, 아편, 사랑에 중독된 리의 마지막은 누군가 경고했던 그대로였다. 야헤는 ‘거울처럼 자신과 마주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진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이 감정에서 도망쳤다. 한편, 리는 끝내 이루지 못한 이 불완전한 사랑에 허우적거리며 빠져나오지 못한 채 점점 더 깊이 잠기고 만다.
구아다니노 감독은 또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 이 영화는 윌리엄 S. 버로스의 동명 자전적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며, 과거에도 몇 차례 영화화 시도가 되었지만 무산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도는 상당히 도전적이다. 그는 "타인에 대한 깊은 갈망"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이 작품을 자신의 "가장 개인적인 영화"이자 "평생의 예술적 프로젝트"라고 묘사했다. 그는 남성 간의 욕망, 고독, 자기혐오와 같은 노골적인 주제를 중년 퀴어 인물에 투영해 섬세하게 그려낸다. 주류로 소비되는 이상화된 퀴어 이미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퀴어 남성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불편하고 때론 혐오스럽다고 느껴질 수 있는 장면들조차 숨기지 않는다. 날것 그대로의 삶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영화는 중년 남성을 통해 노화하고 소외된 몸으로 경험하는 사랑의 고통과 갈망을 드러낸다. 특히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었다고 언급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으려한다. 뜨겁지만 감정적으로 폭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 절제된 표현을 통해 억눌린 감정이 전해져 온다. 리는 단순하게 외로움 혹은 고독으로 표현될 것이 아닌 공황을 유발할 정도의 내면적 붕괴다. 이 영화는 리의 짝사랑,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고독과 절망에 초점을 맞춘다. 육체적 관계에 덜 집착했다면 관계는 조금 달라졌을까? 그런 질문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유진의 애매모호하면서도 어딘가 따뜻했던 시선은 분명 리의 마음을 흔들었고, 그래서 더더욱 유진의 시점에서 이 관계를 바라보고 싶어진다. 이 영화는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일방적이고, 그렇다고 집착이라고 치부하기엔 양방의 감정이 느껴져서 복잡해서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