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사> 리뷰
쇼마이 신지 감독이 연출한 1993년 작 영화 <이사>는 제46회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작품이다. 히코 다나카 작가의 소설 <두 개의 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2025년 7월 23일 마침내 이 영화가 한국에서 첫 정식 개봉한다.
12살 소녀 렌코는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첫 번째 이사를 경험한다. 아빠와 엄마는 이제 다른 집에서 살게 되고 렌코는 엄마와 지내게 된다. 렌코의 가족을 지키기 위한 모험이 시작된다.
한 소녀에게 태풍이 몰아친다. 화목하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가족이 무너지고 해체된 그 자리에서 다시 웃고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니. 이 모든 상황은 자신의 존재마저 부정하는 듯하다. 어디에도 말할 수 없고 아빠의 빈자리는 감추려 해도 티가 난다. 정말 혼란스러운 순간이었다. 세 명이서 살고 웃으며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 생각했던 식탁은 어느새 엄마와 자신만이 남아있었다. 장마가 끝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이사'는 확정됐다. 당연하게 여겼던 가족의 형태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을 마주한 렌은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해 훼방을 놓는다. 다시 함께 하기 위한 노력이었지만 어른들에게 렌의 모습은 그저 심술궂은 투정일 뿐이었다. 아무리 말해보아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있지. 난 아빠랑 엄마가 싸워도 참았어. 그런데 왜 아빠 엄마는 못 참는 거야?"
렌은 아빠의 빈자리만큼 넓어진 집 안 공간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무언가 불편했던 것을 정리해 낸 사람들처럼 오히려 홀가분해 보였다. 엄마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둘을 위한 계약서’를 써 렌에게 건넸지만 그것은 너무 일방적이었다. 상의되지 않은 일인 데다가 이별할 준비조차 되지 않았던 렌에게 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러웠다. 무엇보다도 그저 화목한 가족이라 믿고 있었기에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부모님이 이혼한 친구가 말하길 "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들 또한 받아들여야 하기에 각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렌은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부모님이 이혼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세 사람이 앉아 있는 식탁은 특이하게도 삼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원이나 사각형이 아닌 뾰족한 삼각형은 이미 가족 구성원 간의 균열이 일어났음을 암시하고 있다. 불편함이나 긴장감이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어떤 갈등의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식탁에서 대화가 활기를 띄는 대화'라는 문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밥을 먹은 후 자신만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아빠의 모습과 그 후 이어지는 이사하는 아빠의 모습은 가족 관계가 이미 틀어진 현실을 보여준다.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렌의 노력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였다. 벌어진 사이를 다시 붙이긴 역부족이었다.
렌은 엄마와 아빠를 피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이사 후 처음 만난 두 사람은 평소에 참아왔던 말들을 쏟아냈고 싸운다. 서로 렌을 혼란스럽게 하지 말라고 말하며 이혼 결심을 더욱 굳힌다. 이후, 렌은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자 아빠는 렌의 방으로 올라가 렌을 부르다 계단에 주저앉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렌이 가만히 있다가 아빠에게 기린인형을 건네는데 받지 못한다. 그 인형은 렌에게 소중한 인형이다. 행복이자 가족의 온전함을 상징하는데, 그것이 떨어지는 장면은 소중한 것이 지켜지길 바라지만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막을 수 없다는 무력감과 상실감을 드러낸다.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으려는 렌과는 다르게 부모들은 각자 자신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마을에는 여러 가지 축제가 열린다. 영화 속에서 축제는 배경과 은유뿐만 아니라 사라져 가는 일본의 전통과 공동체 문화를 반영한다. 일본은 한때 지역 사회의 결속을 다지는 다양한 축제들로 가득했지만, 현대화와 도시화, 그리고 인구 감소 등의 여러 요인으로 인해 많은 전통 축제들이 점차 사라지거나 변질되고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축제는 그런 변화와 상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희망과 바람을 상징한다. 축제가 천천히 끝나가며 불꽃과 함께 가라앉는 장면은 마치 과거의 공동체가 소멸하는 모습을 닮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연결과 변화의 바람을 담는 의식처럼 보인다. 한편, 세 가족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축제가 끝나가 조금씩 타서 가라앉듯, 행복했던 기억도 그때 함께 했던 물에 가라앉기 시작한다. 현실의 부모가 이혼해 렌이 혼자 남겨진 기분을 느꼈던 그때의 렌처럼 함께 물놀이를 하던 부모가 렌을 두고 물속으로 사라진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렌을 현재의 렌이 안아주며 위로해 준다. 끝을 달려가고 있는 축제와 관계에 이별을 고하는 과정에서 렌은 예상밖의 말을 반복하며 손을 휘젓는다. "축하합니다" 그리곤 자신만의 의식을 치르듯 짚을 태우며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시작을 응원한다는 마음을 담아 고한다. 얼른 어른이 돼서 흩어진 사람들을 연결시키겠다는 결심과 함께.
부모는 아이의 세상이지만 부모는 또 다른 자신의 세상을 열어가야 한다. 누군가의 세상이 된다는 건 정말 책임감이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누구 하나 나쁜 사람이었다. 모두가 최선을 다했기에 더 안타깝다. 시간을 들여 생각해 보는 건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지만 유독 아이들에게 의견을 묻는 일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독립적인 생명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을 먹고 자란다. 다름에 대한 인식 주변과 비슷하게 동화되어 간다. 차별의 시선까지도. 어른에게서 배운 인식은 또 다른 아이에게로 쉽게 스며든다. 동조하지 않으면 퍼지지 않을 것 같은 생각들도 누군가 받아들이게 되면 금세 퍼져나간다. 부정적인 것들은 빠르게 흡수되는 반면, 긍정적인 가치들은 좀처럼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시간이 걸리고,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만큼 어른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쓰러진 렌을 도와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렌은 질문 하나를 던진다. "잊어도 슬픈 건 없나요?"라는 렌의 질문에 할아버지는 "잊어버리는 게 좋아 옛 추억이라는 건 한 손에 셀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해"라고 대답한다. 조금씩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부모의 이별을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극복하게 된다. 어른이 된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사>는 국내에서는 정식 개봉 기회를 갖지 못한 ‘숨은 걸작’이다. 이 작품은 2023년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베니스 클래식’ 부문에 4K 복원본으로 초청되어 최우수 복원 영화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 재조명받았고 마침내 2025년 한국 관객과도 만나게 되었다. 사실 소마이 신지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나에게 잘 와닿지 않았는데, 이 영화는 좀 흐물흐물하면서도 딱딱한 면모가 나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다른 영화가 조금은 별나고 엉뚱한 스타일이 이질적이게 느껴졌다면 이번 영화는 그 엉뚱함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특히 모두의 입장이 이해가 가서 더욱 안타까웠다. 특히 천진난만한 얼굴에 서서히 슬픔이 스며들고, 그 혼란 속에서 저만의 방식으로 조금씩 성장해 가는 모습이 유난히 뭉클하게 다가왔다. 이사라는 비유를 통해 가족의 해체를 그리고 상처받은 아이의 내면과 복잡한 심리를 잘 표현한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