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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박하고도 화려한, 아름다움이라는 허상에 대하여.

영화 <어글리 시스터> 리뷰

by 민드레


한 번쯤은 봤을 법한 고전 동화 신데렐라를 현대식으로 해석한 영화 <어글리 시스터>는 2025년 8월 20일 개봉했다. 에밀리 빌리펠트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주연 배우 레아 미렌의 말처럼 탐욕스럽고 웃기고 무서운 바디호러를 활용한 작품이다. 기존 신데렐라의 큰 메시지는 권선징악이라면 이 영화는 동화 속 일부 설정만을 차용하고 나머지는 완전히 뒤틀어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낸다. '구두가 발에 맞지 않으면 맞게 만들면 돼'라는 메시지는 섬뜩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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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영화는 신데렐라의 의붓동생인 엘비라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축하하기도 전에 아버지 오토가 사망하고 그에게 남은 재산은 없었다. 엘비라의 어머니 레베카는 가계를 위해 엘비라를 결혼시킬 계획을 세운다. 엘비라는 왕자와의 결혼을 꿈꾸며 아름다워지기 위해 성형 수술을 감행한다. 코수술, 교정기 제거, 속눈썹 연장, 극단적 다이어트 등 기이한 노력을 감행하는데, 무도회가 열리는 밤, 엘비라는 과연 왕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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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라


엘비라는 낭만적인 사랑을 꿈꾼다. 시간이 나는 대로 사랑에 빠진 자신을 상상하며 왕자와 꼭 결혼할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있다. 그래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엘비라는 왕자와의 결혼을 원했지만 현재의 모습으로는 꿈도 못 꿀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무도회가 그녀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전에 완벽한 여자의 모습을 갖추어야만 그와 결혼을 꿈꿀 수라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의 도움이 아니면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무도회가 다가올수록 건강은 점점 악화되고 머리카락마저 숭숭 빠지기 시작하지만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그녀가 꿈꾸던 왕자는 천박하고 현실적이지만 엘비라는 여전히 그의 관심을 얻고자 집착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마침내 왕자에게서 관심을 얻지만 그마저도 아그네스에게 빼앗긴다. 그리고 마지막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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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


아그네스는 원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순수하고 고결하고 무한정으로 착한 성정이 아니다. 그녀 또한 계급으로 사람을 나누고 때론 현실을 위해서 속물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다만, 아그네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눈에 띄고 아름답다. 잿투성이의 얼굴을 해도 말이다. 아그네스 또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있다. 하지만 현실이 녹록지 않다. 죽은 자신의 아버지를 묻어주기는커녕 지금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처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구간에서 연인과 사랑을 나누다 엘비라에게 들켜 집의 하녀로 전락하고 만다. 무도회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아그네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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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여자들


엘비라와는 다르게 많은 여성들은 표면적인 사랑을 원해야 했다. 생존을 위해선 돈이 많거나 계급이 높은 남성들과의 결혼만이 유일한 살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여성들은 선택받기 위해 남성들이 원하는 조건의 여성의 모습을 갖춰야만 했다. 크고 반짝이는 눈, 오뚝한 코, 잘록한 허리, 풍만한 가슴의 신체조건. 순종적이면서 요부이면서 조신한 성격까지. 그런 모순적인 요구들이 하나의 이상화된 여성상으로 강요되었다. 설령 본래의 모습이 그렇지 않더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틀에 몸을 도려내고 깎아내야 했다. 더 끔찍한 건, 그렇게 달라지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며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개인의 허영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회가 해롭고 왜곡된 이상을 재생산하는 구조의 산물인 것이다. 진짜 비극은 본래의 자신을 지우고 가공된 허상이 '아름답다' 느껴질수록 더 큰 찬사를 받는다는 것에 아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폭력은 그렇게 재생산되고 정상을 가장한 아름다움으로 포장되어 다시 반복된다. 요즘 밈처럼 쓰이지만 내심 불편한 농담이 하나 있다. 잘생기거나 예쁜 연예인을 보면 "내면의 아름다움은 참으로 하찮은 것이었군요.라는 말이다. 그만큼 외모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고 또 당연하게 숭배하고 있는 의식이 드러난다.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은 인간에게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본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씁쓸함이 맴돌았다. 그 농담처럼 우리는 여전히 내면보다 외면을 우선시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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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외모 천박한 내면, 아름다움이라는 허상


원작의 등장인물과는 전혀 다른 재해석이 눈에 띈다. 동화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순수, 아름다움, 사랑은 환상에 가까운 것이다. 동화가 보여주었던 사랑과 행복은 어디에도 없다. 영화가 채운 그 빈자리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과 광기만이 남아있었다. 그 천박스러운 화려함이 얼마나 부질없으며 파괴적인지를 보여준다. 더 무서운 건, 그 과정이 자극적이지 않은음에도 오히려 더 끔찍하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몸을 깎고 변형하는 과정은 고통스럽고 기괴했지만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 없이 부추기고 있다. 지극히 정상적인 알마만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경악할 뿐이다. 아름다움을 위해서 감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일까. 영화는 묻는다. 우리가 아름다움이라 부르는 것은 진정한 아름다움일까 아니면 사회가 강요한 폭력의 산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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