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지키는 숙명을 타고난 한 남자의 운명.
영화 <지구를 지켜라!> 리뷰
모든 것들은 계획할 수 있지만 계획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바로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체감할 때마다 마음한구석이 쿵하고 내려앉는 느낌이 든다. 이러한 감정을 잘 표현한 장준환 감독의 2003년 작 <지구를 지켜라>는 재평가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속 인물들의 운명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계획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또다시 마주하게 된다. 예측할 수 없는 사건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욕망과 불안 그리고 폭력성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걸까. 영화 <지구를 지켜라>는 그 물음을 유쾌하지만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
줄거리
이병구는 외계인으로 인해 지구가 곧 위험에 처할 거라고 믿는다. 그는 외계인의 침공을 막기 위해 외계인이라고 믿는 한 회사의 사장을 납치한다. 병구는 강만식을 통해 외계인 왕자를 만나 지구의 재앙을 막고자 한다. 한편, 사장의 실종 사건으로 경찰은 수사에 착수한다. 강만식이 경찰청장의 사위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건은 더욱 긴급해진다. 과거 뇌물비리 사건으로 물러나 있었지만, 왕년에 이름을 날렸던 명형사 추상철은 병구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뒤를 쫓기 시작한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강만식은 기상천외한 고문을 견딜 수 없게 되자 급기야 이병구가 수집해 놓은 외계인 자료를 훔쳐보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낸다. 외계인의 음모를 밝히려는 이병구와 외계인으로 추정되는 강만식의 목숨을 건 진실 대결. 과연 개기월식이 끝나기 전에, 이병구는 지구를 지킬 수 있을까?
⚠️ 스포일러 주의: 아래의 내용에는 영화의 핵심 사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실과 망상 사이
병구는 평생 불행 속에서 살아왔다. 그는 그 모든 불행이 외계인의 침략 때문이라고 굳게 믿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 쳤다. 하지만 노력은 번번이 역부족이었다. 다만 외계인을 향한 감정을 토해내는 순간, 그는 잠시나마 현실의 고통을 견뎌낼 힘을 얻는다.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망상극이 아니라 불행을 극복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보인다. 그런 병구를 추적하는 추형 사는 부패하고 무능한 경찰 조직 속에서 유일하게 진실을 밝히려는 정의감을 보여준다. 외부의 압력이나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모습은 병구의 극단적 행동과 대비되며 이야기에 긴장감을 더한다.
고립되었지만 그에게는
사회에서 끊임없이 외면받는 병구의 내면에는 어수룩한 겉모습과는 달리 분노가 쌓여 있다. 그는 자신의 공간이나 비밀이 침해당했을 때 벌떼를 이용해 그 분노를 폭발시킨다. 마치 수행하듯 집요하게. 벌떼는 개별적으로는 무력하지만, 뭉쳤을 때 압도적인 힘을 발휘한다. 이 모습은 사회적 약자의 연대를 상징하는 동시에 인간의 탐욕과 문명이 자연을 파괴할 때 자연이 내리는 경고처럼 보이기도 했다. 병구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사회적 소외로 인해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 공허함을 메운 것은 인간이 아닌, 무생물인 마네킹이었다. 병구에게 마네킹은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존재이자, 언제든 거대한 적과 싸울 수 있는 군단이었다. 그러나 감정 없는 마네킹의 모습은 폭력에 무감각해지고 점차 인간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비추는 거울처럼 비치곤 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생명체 중, 병구의 말을 믿어주고 또 도와주는 인물은 순이 밖에 없다. 순이는 병구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병구는 순이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이는 그에 대한 진심 어린 마음으로 병구를 지지하고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다. 강아지 지구는 영화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지는 않지만 병구에게 작은 위안을 주는 존재다. (다만, 외계인의 먹이만을 먹어야 한다니..)
복수와 실험: 강만식과 외계인
이병구는 외계인의 존재를 굳게 믿는다. 그들은 지구 침략을 위해 술수를 부렸으며 자신의 불행 또한 그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확신한다. 불안감을 조성하는 미지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그는 집요하게 연구를 이어간다. 그러던 중, 외계인으로 의심되는 강만식을 손에 넣게 된다. 강만식은 ‘로열 복제 유전자’를 지닌 유일한 인물로 안드로이드 왕자와 텔레파시로 연결될 수 있다고 추측했다. 개기월식이 오기 전 반드시 그를 잡아야 재앙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는 괴롭힘과 무시에 시달리지만, 환상 속에서만큼은 지구를 지키는 영웅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싸움은 외계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끝없는 불행의 늪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강만식의 정체는 역시 외계인이었다. 그는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인간의 역사를 목격해 왔다. 아무리 다시 원상복구를 해도 인간의 DNA는 변하지 않았고, 그는 그 본성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모든 유전자를 변형시켜 불행을 유발하는 실험을 감행한 것이다. 실험이 성공한다면 인간은 파괴가 아닌 구원의 대상으로 증명될 수 있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실험 대상자 중 하나였던 병구는 평생 불행에 잠겨 살았지만, 결국 폭력으로 목적을 이루려 했고, 그의 주변 인물들 역시 불신과 이기심, 폭력성을 드러냈다. 병구는 자신이 혐오하던 세상의 폭력성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었던 셈이다. 외계인은 이 개체가 스스로를 치유하고 폭력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지 지켜봤지만, 끝없는 잔혹성과 절망만을 확인한 끝에 지구를 폭파시키고 만다.
과대평가된 범작 혹은 과대평가된 B급 영화.
영화는 전형적인 SF라기보다는 오히려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동시에 과소평가된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과대평가된 측면도 있어 애매한 인상을 남긴다. 줄거리는 해석의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을 만큼 명확하다. 겉으로 보면 병구가 외계인의 위협으로부터 지구를 구하기 위해 유제화학 사장 강만식을 납치하고 고문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결말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보여주는 병구의 극단적 행보는 그저 망상의 산물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던진다. 그의 행동은 정당화되기에는 지나치게 잔혹하고 폭력적이며, 그 속에는 삐뚤어진 정의감과 왜곡된 연대 의식이 드러난다. 그가 겪어온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한 불행은 결국 그의 전부가 되었다. 영화는 인간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증오, 그리고 약자에 대한 착취가 외계인의 침략보다 더 끔찍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같은 종족을 학대하고, 그것을 즐기기까지 하는 생물은 인간 외에는 없다는 말과 함께 절망이 맴돈다.
그리고 문득, 란티모스 감독의 차기작 <부고니아>가 우리 앞에 어떤 얼굴로 나타날지 궁금해진다. 《부고니아》는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되었으며,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이콘 섹션에도 초청되었다. 9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공개 된 후, 11월 국내 개봉 예정이다. 원작의 키치한 감수성을 과감히 없애고, 은유와 상징을 통해 고요한 광기를 선보일 예정이라는 이 작품은 현대 사회의 불안과 권력 구조를 날카롭게 비춘다. 란티모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인간 본성이 실제로 무엇인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경고를 울리는 이야기"라고 밝혔다.
제목인 부고니아는 소의 썩어가는 사체 속에서 꿀벌이라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려는 의식을 뜻한다. 병구는 강만식 사장을 외계인이라 믿고 그를 납치해 끔찍한 고문을 가하며 진실을 알아내려 한다.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지구를 구원하려는 행위다. 자연의 섭리가 아닌 부고니아처럼 기괴한 믿음에서 비롯된 의식으로 비유된 제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