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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불태울 만큼 타오르는 폭력적인 사랑에 대하여.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리뷰

by 민드레


사랑이란 무얼까. 수많은 철학자들이 답을 도출하려 했지만 몇 세기가 흘러도 여전히 뚜렷한 답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런 불완전함이 사랑을 더욱 매혹적이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1991년작 <퐁네프의 연인들> 역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고 있다. 이 영화는 누벨바그의 전통에서 벗어나 대중문화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시네마 뒤 룩(cinéma du look)의 대표작으로 격정적인 사랑을 예술적인 광기로 표현해 더욱 흥미를 끌고하고 있다.



줄거리


파리 센느강의 아홉 번째 다리 퐁네프. 사랑을 잃고 거리를 방황하며 그림을 그리는 여자 ‘미셸’, 폐쇄된 퐁네프 다리 위에서 처음 만난 그녀가 삶의 전부인 남자 ‘알렉스’. 마치 내일이 없는 듯 열정적이고 치열하게 사랑한 두 사람. 한 때 서로가 전부였던 그들은 3년 뒤, 크리스마스에 퐁네프의 다리에서 재회하기로 하는데...



운명적인 만남


퐁네프 다리는 2년 간 노후화 보수 공사를 한다. 노숙자들은 더욱 거기 머물기 쉬워지면서 미셸과 알렉스의 만남 또한 아주 사소한 데서 시작됐다. 스쳐 지나갈 인연이라 할지라도 그건 심상치 않은 기류임을 짐작케 했다. 처음엔 미셸이 다친 알렉스를 들여다보았고, 두 번째엔 퐁네프 다리의 한 구석에서 누워있는 미셸을 알렉스가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알렉스가 미셸에게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건 그녀가 그린 자신의 그림 때문이었다. 자리에서 쫓아내지 않고 그녀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주고, 그녀에게 그 그림을 달라고 한다. 미셸은 그리게 해 주면 주겠다고 말한다. 알렉스는 그리다가 쓰러진 미셸을 원래 자리에 옮겨두고, 그녀를 위해 고등어를 훔쳐 요리를 해주며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검은색: 주인공들이 처한 노숙 생활의 암담한 현실, 미셸이 겪는 실명의 공포,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를 상징.

붉은색: 이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불타오르는 알렉스와 미셸의 격정적이고 위험한 사랑을 상징





격정적인 사랑과 희생


세상 속에서 서로를 조금씩 가꾸어가는 안정적인 사랑도 있지만 때로는 세상의 전부를 적으로 돌리고 서로를 향해 돌진하며 자신을 모두 불태워버리는 사랑도 있다는 것이다. 그 불꽃이 자신을 소모시킨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의 완전한 충만감을 위해 기꺼이 뛰어드는 그런 사랑 말이다. 우리는 그 사랑의 엄청난 파괴력과 대가를 알고 있기 서늘하게 느껴지지만 동시에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인간이 가장 완전한 순간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불태우는 모순적 존재임을 우리 마음 한편이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희생적이고도 숭고한, 순수한 사랑을 마음 한구석에서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선이 맞닿으며 변화하는 관계


두 사람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미셸의 시선은 예술가의 관찰자 시점이지만, 알렉스의 시선은 연인의 시점이라 할 수 있다. 미셸은 쓰러진 알렉스를 보고 일반적인 구호조치가 아닌, 예술적 영감을 자극하는 피사체로서 바라본다. 원초적인 고통과 생명력을 포착해 담은 것이다. 알렉스는 미셸의 잠든 모습, 그녀가 그린 그림, 슬픔, 그리고 그녀의 전단을 통해 이성적 감정을 느낀다. 정성이 담긴 마음은 상실감을 가진 미셸을 변화시켰다. 과거의 연인 줄리앙을 따라갔다 거부당하면서 마치 총을 쏜 것처럼 지워낸 후 알렉스와 함께 하게 된다. 전혀 다른 두 세계의 사람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일 아침 하늘이 하얗다고 해줘. 그게 만일 나라면 난 구름은 검다고 대답할 거야. 그러면 서로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거야.



집착인가 사랑인가


살아가는데 안간힘을 썼던 알렉스는 이제 미셸에게 온통 시선이 가 있다. 과거의 세상이 닫히고 마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것처럼 그는 그녀와 함께 할 일생을 꾸리기 위해 노력한다. 마치 그녀가 알렉스의 세상인 것처럼, 그렇게 미셸이 외부세계를 그리워하지 않고 다리 위에서의 삶에 만족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잠자리와 음식, 라디오를 통해 음악과 오락거리를 제공함으로써 다리 밖으로 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한다. 심지어 미셸을 찾는 실종 전단도 모두 불태워버린다. 하지만 미셸의 가족이 그녀를 찾는 라디오 소리는 막지 못했다. 상실감과 공허로 가득했던 미셸에게 알렉스는 큰 선물이 되어주었지만 동시에 그녀를 고립시키려는 집착의 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다른 사람을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부질없는 짓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진짜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알렉스와 미셸


남자에게는 모든 것이 부족했고, 여자에게는 풍족했으나 마음적 풍요는 적었다. 전 연인의 이별 통보는 그녀의 세상을 무너뜨렸고, 화가였던 미셸에게 점점 사라지는 시력은 재앙이었다. 그랬던 미셸에게 알렉스는 눈이 되어주었고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다. 미셸을 지극정성으로 돕는 일은 전적으로 미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으나 왠지 알렉스에게 더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마치 어미가 자식의 먹이를 물어다주듯 그는 미셸을 자신의 곁에 붙들어두려 갖가지 방법을 썼다. 사랑한다면 놔주어야 한다는 말이 알렉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사랑할수록 눈앞에 있어야 하고 어디든 함께 해야 한다는 그 마음이 반영되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자라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현재 행하고 있는 헌신과 집착 간의 경계는 오직 미셸을 향해 있다는 것이 조금은 이상하게 여겨졌다. 그의 집착이 폭력적이게 느껴졌지만 미셸의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하는 버팀목이 되어준다는 것이 놀랍다. 르아브르로 향한 후, 미셸의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으나 알렉스는 아마 변하지 않을 마음을 보여줄 것이다. 그것이 두 사람의 사랑이 해피엔딩인 이유다.



완전한 사랑이라는 표현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를 소모하게 만들면서도 완전하게 만든다는 표현이 딱 적절할 것이다. 미셸은 알렉스의 전부였으며, 알렉스는 미셸의 전부였다. 알렉스는 미셸이 떠난 후 자신의 세계를 잃었고, 미셸은 현실을 지울 수 없으면서도 알렉스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서로의 세상이 되었다. 이 불완전한 존재들은 서로의 어둠을 끌어안으며 하나가 된다. 불꽃이 스스로를 태워 빛과 열을 만들어내듯, 그들의 사랑 또한 서로를 파괴하는 과정을 통해 증명된다. 이들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서로의 세상을 지지하는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순수하고도 집착적인 사랑이다. 그들의 사랑을 경험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왠지 모를 뭉클함이 드는 이유는 낭만이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이고 모순적인 감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서로를 태우고 소모시키면서도 그 과정을 통해 완전히 서로에게 닿아 위험하고 불안정하지만 진실한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사랑과는 조금 다르게 그들은 모든 안전장치를 버리고 서로의 존재 자체를 붙잡음으로써 완전함을 얻는다. 그래서 관객은 한편으로는 두려움과 서늘함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서로에게 주고받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유대와 존재감을 마주하며 마음 깊이 울림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영화 밖에서도 불타오르는 광기.


이 영화의 광기는 화면 속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다. 촬영 허가 문제와 주연 배우 드니 라방의 부상 문제로 인해 몇 번이고 중단되었다. 계속해서 연기되면서 세 명의 제작자가 파산했고, 결국 파리의 다리를 통째로 재현한 거대한 세트가 세워졌다. 천문학적으로 불어난 제작비는 재앙이었지만 동시에 현실의 제약을 벗어난 완전한 창작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영화 속 인물들이 사회 규범을 거부하고 미친 사랑에 몸을 던졌듯, 제작 과정 또한 산업 논리와 재정적 합리성을 거부한 ‘미친 창작’의 기록이었다. 카락스는 자신의 예술적 비전을 위해 명성과 자본, 심지어 경력마저 불태웠다고 하니 이보다 더한 광기가 또 어디 있겠는가. 불꽃처럼 격렬히 타오른 사랑은 결국 사라지고 불꽃처럼 미친 예술도 언젠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이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시간과 그 찰나의 강렬함은 여전히 스크린 위에서 살아 숨 쉰다. <퐁네프의 연인들> 은 우리에게 묻는다. 사랑이 정답 없는 질문이라면, 그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리, 얼마나 깊이 타오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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