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랑켄슈타인> 리뷰
미리 보면 더욱 슬프고 뭉클하게 다가올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2025년 10월 22일 제한 상영을 거쳐 2025년 11월 7일 넷플릭스에서 공개예정이다. 기괴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연출의 마법을 부리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손에서 펼쳐질 <프랑켄슈타인>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된다.
영화는 크게 3가지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구성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배의 선장, 창조주와 피조물. 처음 느꼈던 사랑과 열망은 어느새 사라지고 증오와 분노만이 그 자리를 채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신의 고유한 권한을 건드려서일까. 미래를 예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자신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함이 자신에게 독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처를 입은 이들의 조각을 모아 생명을 불어넣겠다는 다짐과는 다르게 상처 가득한 괴물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만들겠다는 열망이 피어난다. 어떤 것도 그의 실험의지를 꺾어놓을 수 없었다. 그의 극단적인 방식을 제외하면 실력만큼은 확실했다. 상처를 모으면 그저 상처 입은 사람일 뿐 더 나은, 완전한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런 당연한 이치를 왜 몰랐던 걸까. 그는 당연하게도 성인의 모습을 한 생명체에게 일정한 지식을 불어넣으면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 생명체에게 이름을 지어주지도 않았고 어떤 형태로 빚을 거라는 계획조차 없었다. 그에겐 생명을 창조하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그의 말처럼 정말 괴물이 될 것인지는 오로지 그의 손에 달렸다.
하지만 그의 결핍이 만들어낸 피조물은 그저 사랑을 바랐을 뿐이다. 창조주는 자신을 만들어냈지만 혐오했고 사랑하는 것들은 자신을 떠나간다. 그런 괴로움과 절망, 슬픔이 모여 분노로 표출되었다.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그가 말할 수 있었던 단어는 빅터, 빅터, 빅터였다. 다른 사람들에 앞서 무언가를 창조해 냈다는 우월감에 빠져 만든 자의 책임감에는 무게가 실려있지 않았다. 그 가벼움의 결말에는 누가 괴물인지도 인식할 수 없게 그를, 또 생명체를 망쳐놓았다. 빅터에 대한 연민도 자라날 수 없게 그는 자신이 괴물을 만들었다는 절망감, 꿈에서 신이 내려주었던 권한이 제 것이 아니었다는 실망감이 그를 좌절감에 빠뜨려 생명체를 방치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면 처음 본 생명체를 엄마로 인식하고 졸졸 따라다니고 삐약삐약 한다는 사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따뜻하게 품어준 적이 없었다. 마치 기계처럼 학습하게 만들었고 동물처럼 묶어두었다. 그에게 내재된 폭력성이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판단력을 쥐어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름 하나 붙여주지 않은 그 생명체는 사랑을 갈구한다. 자신을 창조한 빅터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을 갈구한다. 하지만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자신을 감싸준 엘리자베스, 그리고 할아버지는 먼저 손길을 내밀었다. 사랑의 힘을 알게 된 그는 자신과 같은 존재가 나타나길 바랐다.
그가 만드는 괴수는 인외, 그러니까 인간이 아닌 존재이면서 괴물이라 불린다. 사실 그들은 완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소외되고 비난받으며 더욱 움츠러들었다. 죽음을 통해 생명을 만들어내고 다시 죽음을 만들어내는 연결고리는 어쩐지 씁쓸하면서도 서글픈 일이었다. 누군가를 떠나보냈다는 슬픔과 생명을 재창조하겠다는 욕심이 모여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냈지만 생명은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신의 영역에서 벗어난 선택은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는 죽음 또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생명체의 결말이 절망으로 끝날지 또 다른 행복을 찾아낼지는 순전히 자신의 선택이겠지만
엄청 긴 러닝타임이지만 그 안에 창조자와 피조물의 시선이 담겨 있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때까지 봤던 프랑켄슈타인은 다 거짓말 같이 느껴질 정도로 엄청나게 섬세했다. 영화를 보면서 누가 괴물인지 계속 찾게 된다. 더 이상은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더 말할 수 없지만 꼭 극장 상영으로 만나봤으면 하는 작품이었다. 여러 갈래로 구성되어 있고 저마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펼친다.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지는 지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었다. 원작의 '괴물'과는 많이 달라서 더욱 흥미롭게 봤던 영화다. 원작과는 또 다른 각색으로 흥미를 유발하는 기예르모 델토로 감독의 마법에 빠져들 차례다. 끝까지 그를 이름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