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를 싣고 떠난 여행, 그 끝엔 구원이 있었을까.

영화 <유레카> 리뷰

by 민드레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2000년작 <유레카>는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기타큐슈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대중적인 흥행작은 아닐지라도, 그 예술적 깊이와 주제 의식 때문에 다시 주목하고 재평가해야 할 일본 영화의 수작 중 하나다.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주제와 유기적으로 엮이는 독특한 미장센이 돋보이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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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평화로운 한 시골마을에서 버스 총기 인질사건이 벌어진다. 버스 기사인 사와이 마코토, 남매 나오키 코즈에 이 세 사람만이 생존했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마코토는 가출을 하고, 남매는 스스로 고립되는 삶을 선택한다. 사건으로부터 2년 후, 마코토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건설 사무소로 취직했고 생존자 남매 소식을 듣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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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이후, 버스 기사였던 사와이는 분노, 회피, 죄책감과 같은 복합적인 감정으로 인해 아내를 내버려 둔 채 집에서 가출하게 된다. 생존자로서의 죄책감을 감당하지 못해 도피한 것이다. 사와이는 트라우마 이전부터 어떤 일이 생기면 침묵으로 일관하던 습관이 있었는데, 버스 하이재킹 사건은 그의 습관이 극대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가출은 세상과의 교류를 거부하고 자기 파괴로 이어지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회피다. 그는 그 사건을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2년 후 고향으로 돌아와 건설 사무소에 취직한다. 버스 운전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일이었다. 완벽하게 치유된 것은 아니었지만 극도의 회피 상태에서 벗어나 사회로의 복귀를 시도하는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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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매는 버스 테러 사건이라는 1차 트라우마를 겪은 후, 세간의 지나친 관심에 고통받다가 어머니는 집을 떠났고 아버지는 사망하는 가정해체라는 2차 트라우마를 연이어 경험한다. 그 후 아버지의 사망 보험금을 노리는 친척들의 관심이 이어지자 남매는 말을 잃고 집에 스스로를 가두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침묵과 자발적인 고립은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하는 형태로 이어졌다. 남매에게 이 집은 완전한 피난처지만 스스로를 가두는 자발적인 감옥이기도 했다. 이들은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서도 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단 침묵으로. 이 행위는 외부 세계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관계와 구원을 갈망이 공존함을 보여준다. 이후 사와이가 남매가 근처에 산다는 소식을 들은 후 남매와 같이 살며 음식을 챙겨준다. 남매도 그런 마코토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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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을에는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났고 형이 사와이를 의심한다. 그로 인해 사와이는 다시 집을 나오게 됐고 남매와 같이 살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사건이 또 발생했다. 바로, 마코토에게 호감을 보이던 사무소 직원 유미코가 연쇄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된 것. 버스 인질극 사건에 투입되었던 형사가 이 사건을 담당했고, 사와이가 인질극 사건의 범인과 같은 눈을 하고 있다며 그를 의심한다. 일정 시간 동안 구치소에 수감된 마코토는 힘든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후, 마코토는 다시금 버스를 다시 마주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며 작은 중고 버스를 구매해 여행용 캠핑버스로 개조한다. 중간에 포크레인 운전을 하면서 '그다지 트라우마도 생기지 않고 괜찮더라' 생각하며 버스 운전을 할 수 있게 된다. 사와이는 두 남매에게 여행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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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당연히 망설였지만 같은 상처를 공유하는 세 사람은 사와이가 개조한 버스를 타고 목적 없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이 여행은 정체된 과거와 단절하고 움직이는 현재 속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구축하여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시도였던 것이다. 버스는 과거 사건이 발생해 트라우마의 매개체로 남았지만 사와이가 캠핑 버스로 개조함으로써 이동 가능한 집이자 새로운 삶을 시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의미가 바뀐다. 이 여정은 목표가 정해져 있지 않고 떠나는 행위 자체만으로 과거에 정체된 시간에서 벗어나 심리적 해방을 추구하는 행위다. 버스는 트라우마의 시작이었던 공간에서 이 여정의 시작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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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의 관계는 어쩌면 함께 해서는 안될 그런 비정상적 관계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상처를 공유하고 해체된 기존 가족의 공백을 채움으로써 대안적 가족의 형태를 이룬다. 남매를 사와이가 돌봐줌으로써 시작된 이 관계는 집보다 더 좁아진 버스 안에서의 같이 생활하면서 더욱 깊어진다. 또한, 사촌 아키히코가 합류하면서 고립된 세 사람에게 외부의 건강한 에너지와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한다. 다만, 나오키의 행동에 대해서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모습을 보인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에는 긍정적인 에너지로만 이루어질 수 없으며 트라우마를 공유하고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들과는 여정을 함께 할 수 없었다. 나오키와 코즈에는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고 사와이의 거듭된 노력으로 두 남매가 회복하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모든 게 무너져도 살 의지를 그리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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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트라우마를 겪고 있음에도 저마다 회피, 분노, 침묵, 죄책감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생존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분명하게 나오지 않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감만으로도 당연히 어떤 감정을 정확하게 드러낼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트라우마가 낳은 언어의 무력화와 심리적 혼란인 것이다. 이 영화의 배경에는 집단적 트라우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특히, 1995년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 사건에서 깊은 영감을 받은 <유레카>는 평화롭고 안전한 사회라는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당대 일본 사회의 상실감을 반영한다. 이는 죽음과 재난에 대한 사람들의 소모적 관심과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들을 향한 집단적 냉대로 이어진다. 사와이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떠났다고 했지만 극복은 지금의 트라우마를 마주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유레카>는 "누구나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을 계속할 뿐이다"라는 메시지를 통해, 트라우마를 완전히 지우는 것이 아닌 상처를 안고 삶을 계속하는 행위가 진정한 극복임을 선언한다. 이러한 깨달음과 치유의 순간은 이제 영화의 미장센, 즉 색채의 전환을 통해 시각적으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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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유레카>는 대부분을 흑백에 가까운 세피아 톤으로 채우며 해당 사건이 인물들에게 미친 심리적 영향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이 모노크롬의 미장센은 트라우마로 인해 세상의 활력을 잃고 잿빛으로 변해버린 인물들의 무기력하고 고립된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 이는 침묵과 회피가 지배하는 정체된 과거의 시간, 즉 '트라우마로 인해 멈춰버린 시간'을 상징한다. 버스가 마을에 멈춰서 있던 2년의 시간과 인물들의 내면적 고립은 이 단조로운 색채 속에서 극대화된다. 하지만 개인적/공동체적 치유가 완성되는 순간, 영화는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그 깨달음을 선언한다. 버스 여행 끝에 코즈에가 모든 것을 떨쳐버린 순간, 화면은 컬러로 전환된다. 영화의 제목 '유레카!'처럼. 이는 인물들이 과거의 흑백 같던 트라우마의 시간에서 벗어나 생명력과 활력이 넘치는 '현재'와 '미래'로 나아갈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화는 치유는 상처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안고도 세상을 다시 컬러로 바라볼 수 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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