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홍수의 무한한 실험 속에 침몰한 설정의 구명보트.

영화 <대홍수> 리뷰

by 민드레


재난 영화가 흥행 보장 수표인 이유는 어떤 고난에서도 인류는 결국 살아남아 희망을 남긴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대홍수>가 남기고 싶었던 메시지와 질문은 우리가 알고 있는 보통의 재난영화와의 문법과는 결이 다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익숙한 믿음에서 벗어나 감정이 설계되고 학습될 수 있는 시대에서 '인간다움'은 과연 어떤 형태로 남게 될까. 2025년 12월 19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화 <대홍수>는 그 질문을 재난의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wkxB3gsB2EBq1Uw2mdDkKZmeFvd.jpg


줄거리


소행성 충돌로 인해 대홍수가 발생하고 지구는 물에 잠겨가는 대종말의 위기에 처했다. 안나는 아들 자인과 함께 물이 차오르는 아파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viJkl69aawCVD5zz7zfmw7axkF6.jpg


<대홍수>는 전형적인 재난 영화의 문법으로 시작된다. 소행성 충돌로 인해 지구에 위기, 아니 종말이 닥쳤고 주인공은 핵심인물이라 탈출 1순위가 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사투는 초반부 긴장감을 유지해 간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재난 영화 특유의 긴박감이나 고난이 다소 평이하게 그려진다는 것이다. 전 지구적 대홍수라는 설정이 무색하게 주인공이 겪는 시련은 그리 처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을 위협하며 극의 긴장감을 끌어올려야 할 강렬한 빌런의 존재조차 희미하다. 침수되는 아파트에서 옥상을 선택하지 않는 주민들이 이해되지 않는다. 옥상으로 탈출한 주민들로 인해 탈출이 어려운 주인공의 역경을 다루지 않는다. 언급만 될 뿐이다.


axo4TWPI5Ge4fF3vgzth9aYXklW.jpg


이러한 장르적 허술함은 중반부 이후 영화가 SF와 휴먼 드라마로 급선회하며 더욱 잘 드러난다. 중반부에 접어들며 영화는 재난 아포칼립스의 영역에서 벗어나 SF, 휴먼드라마로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이야기의 중심은 인류 멸망에 대비한 '새 인류 양성 프로젝트'였다. 바로, 안나가 개발하던 이모션 엔진이 핵심이었다. 아들 자인이 폐기된 이후, 아들을 구하기 위해 특정 상황을 반복하는 시뮬레이션으로 (딥러닝) 모성애라는 감정을 AI에 학습시키기 위한 딥러닝 과정이었다. 인공지능에 모성애를 학습시킨다는 거창한 설정이지만 극의 핵심인 '모성애'에 대한 표현은 다소 아쉽다. 기른 정이 낳은 정만큼 깊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직접 낳은 자식이 아니라 배양하듯 심어서 키워낸 존재라는 설정에서 감독이 의도한 모성애의 깊이는 관객에게 온전히 와닿지 않았다. 인공적인 탄생 배경과 부족한 서사 탓인지 안나가 보여주는 처절한 집착은 숭고한 모성애라기보다 설계된 프로그램의 오류처럼 낯설게만 느껴진다. 주인공 안나의 애매한 설정이 그 간극을 더 넓혀놓았고 모성애라는 감정은 세련된 SF적 상상력을 덮어버릴 만큼 올드하고 작위적으로 다가온다.


t1xY6JTDZDB8qHEjIgcO4v3ozq6.jpg


하지만 이러한 SF적 상상력과 설정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개연성은 상당히 떨어진다. 인류를 멸망시킬 대재앙을 이미 예견했음에도 왜 뒤늦게 프로젝트에 투입시켰는지 의문이 들었다. 심지어 모든 것이 파괴되는 일촉즉발의 순간에. 극적 긴장감을 위한 억지스러운 장치로 보인다. 기대했던 만큼 실망도 컸던 영화였다. 영화는 하고 싶은 말도, 해야 할 말도 너무 많아 보이는데 정작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는 뚜렷하지 않다. 말 그대로 '정보의 대홍수' 그 자체다. 재난 영화도, SF도, 휴먼드라마도 아닌 이 모호한 결과물은 흥행이 보장된 소재들을 가지고도 낡은 가치관과 설정오류, 불친절한 설명으로 인해 장르적 장점을 모두 잃었다. 쏟아지는 정보와 설정 속에서 정작 관객에 타야 할 구명보트는 보이지 않는 아쉬운 침몰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