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라트> 리뷰
어떤 영화는 설명하지 않고도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관객을 이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리듬, 설명할 수 없는 진동, 그리고 어딘가 잘못된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 시작한다. 2026년 1월 21일 개봉한 영화 <시라트(The Sirāt)>는 제78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이자 심사위원상 수상작으로, 보이지 않는 전쟁의 공포를 감각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최후의 심판 날 모든 사람이 건너야 하는 지옥 위의 다리를 뜻한다. 죄가 없는 자에게는 넓은 길로 변해 천국으로 인도하지만, 죄가 많은 자에게는 칼날보다 날카롭고 머리카락보다 가늘게 변해 지옥으로 떨어지게 만든다는 심판의 상징이다.
우리는 운 좋게 지뢰를 피한 것처럼, 운 좋게 전쟁을 피하고 있는 불안한 형국을 살아가고 있다. 타국의 전쟁 소식에 안타까워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 그리고 '나 살기도 바쁜데'라는 이기심 섞인 자각이 교차할 때 마음은 더욱 아파온다. 영화 속 개연성 없는 죽음들은 비현실적이게 보이지만, 사실 현실은 그보다 더 참혹하고 엉망진창인 일들이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다. "비난한다고 해서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이 들다가도, 막상 국제사회의 무관심에 방치될 그들의 모습에 마음이 심란해진다. "만약 우리나라가 그렇다면?" 과연 고민만 하고 있을 수 있을까. 더 이상 화면 밖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의 시작부터 들려오는 기괴한 소음은 불쾌하지만 사람들은 그 리듬에 맞춰 해가 질 때까지 광적으로 춤을 춘다. 또한, 라디오는 매일 심각한 전쟁 소식을 전해오며 희망은 없는 걸까요 라는 의문을 비친다. 그 희망 없는 절망에 사람들은 스피커가 만들어낸 소음의 성벽 뒤로 숨어버리게 된다. 여기서 스피커는 정보를 알리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탈출구로 이용된다. 이는 스마트폰에 중독된 우리의 모습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다. 세상의 모든 정보를 볼 수 있는 기기를 손에 쥐고도, 정작 내 곁의 고통과 불편한 진실을 보지 않으려 자극적인 화면에만 몰입하는 우리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종교가 힘을 잃은 시대에 거대한 스피커와 AI는 새로운 신이 되어 우리를 마비시키고 있다. 마치 끓는 물속의 개구리처럼.
사람들이 이토록 음악에 심취한 이유는 어차피 변하지 않을 잔인한 현실을 잊기 위함일 것이다. SNS와 약물이 주는 도파민 중독 상태는 현실의 공포를 잠시 잊게 하지만 그때가 지나면 다시 현실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그 자극에 반응하지 않고 소음으로 치부하는 루이스만이 지뢰밭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채워지지 않는 결핍과 뚜렷한 희망을 품은 자에게는 가짜 환각이 침투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무력감에 빠져 자극에 몸을 맡긴 군중과 불쾌함을 견디며 지면을 딛는 개인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파민에는 낙원이 없다.
전쟁은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곁에 있는 사람들을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지워버린다. 개인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 이 거대한 파괴 앞에 선 인간의 무력감은 처절할 정도로, 잔혹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벌어진다. 세계화로 인해 전 세계 모두와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정작 타국의 비극을 도울 힘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절망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이처럼 광활한 사막은 막막하지만 결국 헤쳐 나가야만 하는 우리의 삶처럼 표현된다. 직선, 점선, 설령 끊어지더라도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 전쟁의 늪처럼 발을 잡아끌어도 겨우 벗어나더라도 다시 삶은 계속된다.
이 영화는 직접적인 전쟁 장면을 단 한 컷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장면의 부재는 오히려 온몸을 충격적인 감각으로 휘감으며, 두렵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수 없는 공포를 선사한다. 자극적인 전쟁 장면과 수없이 스러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라 발밑의 진동, 웅성거리는 소음, 우리 곁에 있는 죽음은 전쟁이 일상인 곳의 공포를 체감하게 만든다. 지뢰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른다는 불안, 그리고 그 비극이 바로 내 옆에서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그 어떤 시각효과보다 강력하다. 전쟁은 영화 화면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파민의 낙원 뒤에 존재하고 있었다. 공포스러운 장면은 노골적으로 보여주지 않음에도 영화는 무척이나 충격적인 방식으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소리 없이 보이지 않는 전쟁은 이미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그 진실을 가리던 소음의 성벽이 무너진 자리에는 비로소 서늘한 침묵이 자리 잡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얼마나 길어질지, 언제 끝날지 모를 이 상황은 재난이 일상이 된 상황이다. 그 누구도 아닌 우리나라 안에서 벌어진 전쟁의 참사가 불러온 것이다.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참혹함을 깨달은 이들이 휴전을 선언했지만 전쟁은 멈춘 적이 없다. 다만 그 방식이 총과 칼이 아닌 거대한 스피커를 통한 국가주의적 선동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영화 속 거대한 스피커는 사람들처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선동의 소음으로 눈과 귀를 가려버린다.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수많은 개인의 비극은 선동이 낳은 가장 참혹한 결과물이다. "세상의 종말은 오래전부터 시작됐어"라는 말처럼 우리는 그 선동에 취해 이미 무너져가는 세계의 일부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이 언제든 지뢰밭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스피커가 내뿜는 광기 어린 리듬에 맞춰 위태로운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허황된 도파민의 낙원을 거부하고 고통을 감내하며 지뢰밭을 지나 고독을 안고 나아가야 한다.
영화는 딸을 찾아 나서는 길에서 시작되지만 생존의 기로에 놓이며 조금씩 목적의 초점이 희미해진다. 그 끝에서 어떤 희망도, 어떤 절망도 섣불리 약속하지 않는다. 그저 사막이 흡수해 버리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묵묵히 응시할 뿐이다. 이토록 건조하고 냉정한 메시지는 사막의 모래를 집어삼키는 것처럼 보는 이의 목을 막히게 만든다. 선동의 소음이 멈춘 뒤 찾아오는 서늘한 침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그 소음이 멈춘 자리에 또 다른 선동으로 목소리를 채울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기어이 진실을 마주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나만 괜찮으면 돼"라는 기만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지뢰밭 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선동의 최면에 빠지지 않고 서로의 상실을 나누며 인간의 자격을 증명해 내는 것뿐이다. 세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끝나가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 길을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 그 아득한 사막을 헤집고 건너가 거짓된 소음이 아닌 인간의 온기가 담긴 희망의 깃발을 꽂아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