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폭풍의 언덕> 리뷰
서로가 없으면 숨을 쉴 수 없어서, 서로를 끊임없이 탐하고 할퀴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 수차례의 영화화를 거듭하며 고전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폭풍의 언덕>이 2026년, 새로운 얼굴로 돌아왔다. 과연 2026년판 <폭풍의 언덕>이 정의하는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두 배우의 눈빛이 부딪칠 때마다 스크린에는 불꽃이 튀지만, 그것은 따뜻함보다는 위태로운 독약에 가깝다. 불친절한 편집과 설명이 사라진 그 빈틈을, 두 남녀의 숨 막히는 긴장감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요크셔의 황량한 대저택 '워더링 하이츠'. 주인 언쇼가 거리에 버려진 고아 소년과 함께 돌아온다. 그에게 '히스클리프'라는 이름과 거처를 내어주자 주인집 딸 캐서린과 소년은 거친 자연 속에서 서로의 영혼을 공유하는 단짝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아버지의 도박으로 인해 가세가 급격히 기울면서, 캐서린은 히스클리프가 아닌 부유한 이웃집 남자 에드거 린턴과의 결혼을 선택한다. 그 충격으로 떠났던 히스클리프는 몇 년 뒤, 더 이상 더러운 마구간지기가 아닌 매혹적인 신사가 되어 돌아온다. 이제 서로를 향한 집착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번져나가고 두 남녀는 그것이 파멸인 줄 알면서도 끝내 서로를 놓지 못하는데...
캐서린은 에드거와의 결혼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풍족하고 안정된 생활을 즐긴다. 하지만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으로 치장할수록 끝내 손을 잡지 못한 히스클리프의 잔상이 그녀를 괴롭힌다. 5년 후, 히스클리프가 돌아왔다. 그는 더 이상 지저분한 마구간지기 소년이 아니다. 막대한 부와 위험한 매력을 가진 그는 캐서린의 평온했던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영화는 그때부터 달콤한 로맨스를 걷어치우고 독약과 같은 심리전을 펼쳐내기 시작한다. 히스클리프는 잘 다듬어진 신사의 옷을 입었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의 광기가 서려있었다. 그가 선을 넘는 순간 캐서린이 애써 억눌러왔던 욕망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서로를 끌어안는 대신 서로의 숨통을 조인다. 마치 상처를 내야만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처럼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불완전하고도 기괴한 형태로 싹을 틔웠다.
린턴 부인이 된 캐서린은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갈등과 방황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이성적으로는 그를 밀어내야 함을 알면서도 본능은 눈앞의 히스클리프를 끊임없이 탐하고 싶은 원초적인 욕망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녀는 오해 때문에 우리가 어긋났다며 비련의 주인공처럼 괴로워하지만 사실 진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가난이라는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히스클리프를 선택하지 않은 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히스클리프가 던지는 그 한마디는 사랑 고백이자 형벌이었다. "어떤 시련에도 우릴 갈라놓을 수 없었어. 우릴 갈라놓은 건 너야 네가 나를 죽였어" 라면서도 "죽는 날까지 널 사랑할 거야"라는 끈적한 사랑을 캐서린에게 펼쳐낸다.
어느샌가부터 이들의 사랑은 사랑을 넘어선 집착과 소유욕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영화에서는 다소 에로틱하게 그려진 이들의 관계는 이 영화의 가장 큰 아쉬운 부분인 '불친절한 편집'과 맞닿아있다. 두 사람이 진흙탕을 구르며 영혼을 나눴던 유년 시절의 서사가 뭉텅 잘려나갔기 때문이다. 길지도 않은 유년시절의 서사를 단 몇 분 만에 그려낸 데다가 아이에서 어른으로 '훅' 지나버린 시간의 공백이 거리감을 준다. 그들의 감정이 어떻게 저토록 깊어졌는지 이해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감독은 그 개연성의 구멍을 설명으로 채우는 대신, 두 사람의 찐득한 감정선과 치명적인 텐션으로 메꾸는 방식을 택한다. 서사가 실종된 자리에 남은 것은 두 남녀의 육체적인 이끌림과 집착적인 사랑의 행보다.
그 결과,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원작과는 다른 형태가 되어버렸다. 히스클리프는 원작의 짐승 같은 악마성이 아니라 사랑에 상처받은 섹시한 남자로 미화된다. 반면, 그를 끊임없이 밀어내고 괴롭히는 캐서린은 내면의 복잡함이 생략된 탓에, 변덕이 죽 끓는 히스테릭한 광녀로 보인다. 여기에 두 사람의 파국을 방관하거나 은근히 즐기는 듯한 유모 낸시(넬리)의 묘한 시선까지 더해져, 2026년의 <폭풍의 언덕>은 고전 로맨스가 아닌 세련된 치정 스릴러로 변모했다. 원작의 깊이는 얕아졌고 편집은 불친절하다. 그러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서로를 파괴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사랑, 그 유해함이 폭풍의 언덕을 완성시킨다. 폭풍은 사라지고 미풍만 남은 어느 언덕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