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속에 영원할 햄넷, 비극이지만 비극이 아닌 사랑.

영화 <햄넷> 리뷰

by 민드레


만약 '공감'이 인간이 가진 가장 순수한 힘이자 유일한 무기라면 영화 <햄넷>은 그 무기로 우리의 영혼을 꿰뚫는다. 2026년 2월 25일 개봉한 영화 <햄넷>은 사랑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이자 고전의 깊이에서 과거의 비극을 관통하며 누구나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동을 선사한다.


image.png


영화의 줄기는 금단의 사랑과 생명의 잉태로 구성된다. 세상의 눈에는 평범하지 않았던 아그네스와 윌리엄의 결합은 '금단'의 투쟁이었다. 어느 것도 쉽지 않은 쟁취는 둘 사이의 '생명'으로 연결고리를 잇는다. 하지만 비극을 야기하듯 삶은 그들에게 어느 것 하나도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하나, 창작의 고통 뒤엔 사랑이 버티고 있었고, 어렵게 얻은 생명 또한 사랑으로 하루하루 성장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상실은 운명의 장난처럼 너무 허망하게 그들이 공들여 쌓아 올린 세계를 무너뜨린다. 가장 찬란하게 빛나야 할 생명의 정점에서 찾아온 죽음은 치유사의 손길도 아버지의 문장도 닿지 못하는 차가운 정적 속에 햄닛을 가둬버렸다.


image.png


그 정적 속에서 어린 소년은 기꺼이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영웅적 선택을 한다. 죽음의 사자가 쌍둥이 누이 주디스의 숨결을 앗아가려 할 때, "내 목숨을 줄게"라는 말을 하며 누이와 자리를 바꾼다. 이 장면에서 감독은 쌍둥이 누이와 마주하고 있는 소년의 얼굴을 어둠 속에 배치하며 죽음과의 거래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보여준다. 자신의 온기를 건네고 누이의 차가운 열병을 대신 껴안음으로써, 소년은 스스로 죽음의 표적이 되기를 자처하며 뒤엉킨 운명의 실타래를 끊어낸 것이다. 이 '죽음 속이기' 작전은 부재중인 아버지를 대신해 누이와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된다. 아이에게는 너무 무겁고 두려운 운명의 순간이었으나 그 고통에 맞서 "용감해질게요"라는 다짐을 되뇐다. 떠나는 자가 남겨진 이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강인한 위로였다. 이것은 소년이 생명을 준 부모와 자신의 반쪽인 누이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사랑의 방식이었다.


image.png


세상에서 규정하는 보편적인 역할은 모든 영역에서 제한을 둘 뿐만 아니라 개인의 본질을 억압한다. 윌리엄은 '남자다움과 세속적인 성공'을 강요받았으나 자신의 나약함과 예민함을 예술로 승화하며 작가로서의 길을 충실히 걸어간다. 또한, 아그네스 역시 순종적인 '여자다움'을 강요하는 시선에 굴하지 않고 대지의 기운을 읽는 치유사이자 독립된 영혼으로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세상의 틀에서 벗어난 두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되었고 아이들을 낳아 그들만의 견고한 둥지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은 세상이 규정한 전형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각자의 삶을 증명해 왔다. 하지만 그토록 어렵게 지켜온 삶의 터전은 어떤 악마와 거래한다 하더라도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image.png


이 잔혹한 상실은 역설적이게도 윌리엄의 펜 끝에서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다. 비어버린 아이의 방에서 시작된 침묵은 잉크가 되어 흐르고,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빌려 죽음을 초월한 영혼을 빚어낸다. 그리하여 완성된 <햄릿>은 단순한 연극이 아닌, 상실의 고통 위에서 다시 피어난 ‘비극이지만 비극이 아닌 사랑’의 증거가 된다. 이 영웅적 서사는 곧이 곧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햄릿이라는 인물을 통해 투영된다. 세상과 싸우는 고독한 왕자가 된 햄릿은 현실에서 허무하게 사라진 소년 햄넷의 다른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무대 위에서 '유령'이 되어 나타남으로써 죽은 자가 되어 살아있는 아들을 마주하는 꿈같은 일을 연극에 녹여냈다. "내 아들 안녕 안녕 나를 기억해 다오"라는 통곡은 아들을 구하지 못한 아버지의 무력감과 속죄, 그리고 고백이었다. 햄넷은 죽음에 떠밀려갔지만 셰익스피어의 '글'을 통해 영원해졌다. 그 지독한 비극의 시작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상실에서 비롯되었으나 마무리는 아들에 대한 사랑의 기억으로 완성된다.


image.png


이들의 결합이 '금단'의 투쟁이었듯, 윌리엄이 아들을 되찾으려는 시도 또한 신화적 금기에 도전하는 과정과 닮아 있다. 영화는 윌리엄을 죽은 아내를 구하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간 오르페우스에 투영한다. 오르페우스가 거문고 소리로 저승의 왕을 감동시켰듯 윌리엄은 '펜'이라는 무기를 들고 연극이라는 허구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 죽음이라는 절대적 법칙에 저항한다. 이러한 판타지적 요소를 활용했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겠지만 영화는 단순한 선택을 진행하지 않는다. 신화 속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어겨 결국 에우리디케를 영원히 잃고 말았지만 윌리엄은 이와 달리 '뒤를 돌아보는 행위(기억과 기록)'를 통해 아들을 구원해 낸다. 햄닛이 죽음의 사자를 속여 누이의 운명을 바꾸었듯, 아버지는 연극이라는 거울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속여 넘긴다. "나를 기억해 다오"라는 유령의 통곡은 에우리디케를 부르는 오르페우스의 절규인 동시에, 다시는 뒤돌아볼 수 없는 상실의 끝에서 아들의 이름을 영원히 붙잡아두려는 예술가의 처절한 승리이기도 하다.


image.png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그네스에게 부여된 신화적 기운과 치유사의 상징성이 아이를 잃은 한 인간의 감정에 비해 충분히 확장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대지의 기운을 읽는 인물이자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감지하는 존재로 그려지지만 그 후에는 '어머니'의 역할을 부여받으며 상대적으로 '공백'을 남긴다. 초반에 보여주었던 그녀만의 독보적인 '능력'이 비극 앞에서 무력하게 거세된 듯한 연출은 비극의 깊이를 강조하기 위한 감독의 의도된 절제일 수 있으나 초반의 강렬한 캐릭터성이 다소 마모되었다고 읽힐 위험이 있다. 또한 윌리엄의 문학적 성장 과정이 생략된 점 역시 두 사람의 세계가 맞물릴 때 발생하는 스파크를 다소 무디게 만든다. 물론 영화의 초점이 ‘햄넷’에 맞춰져 있음을 고려한다면 이는 하나의 의도된 선택이자 균형일 수도 있다. 그 절제가 침묵의 미학이라 할지라도 두 사람 각각의 세계가 조금 더 깊이 펼쳐졌다면 영화의 울림은 또 다른 결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image.png


"햄넷과 햄릿은 사실 같은 이름이다. 16세기말에서 17세기 초 스트랫퍼드의 기록 문서에서는 보통 혼용되었다."라는 상상력에서 시작된 팩션이다. 이 영화는 사랑의 이야기, 결실, 그리고 비극의 시작이라는 고전적이고도 기본적인 서사의 흐름을 충실히 따른다. 하지만 '감정'에 깊게 몰두하면서도 결코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다. 이 지루할 정도로 느린 호흡과 인물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카메라의 관조적 시선은 감독이 의도적으로 설계한 '사유의 빈 공간'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즉각적인 눈물 대신 이 비극의 설계도를 냉철하게 응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그네스가 처음과 끝이 다른 모습으로 여정을 마무리하는 모습에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왠지 허전한 것은 여전히 비극은 그 자리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그 비극이 글로 남아 가족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성스러운 치유로 승화되었음을 목격하게 된다. '햄넷'이라는 이름은 가장 용감하고 아름다운 이름으로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새겨질 것이다.


이 지점에서 가족의 감정적 부채를 다룬 영화 <센티멘탈 밸류>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햄넷>이 내어주는 공감의 결은 사뭇 다르다. 가족의 슬픔을 '작품'으로 승화한다는 점은 같지만 위로하는 감정이 관객에게도 다가온다는 점이 다르다. 예술은 이처럼 슬픔을 공유하며 함께 구원받을 수 있고 잃어버린 영혼을 위로하기도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