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쇼생크 탈출> 리뷰
어떤 영화는 시간이 지나면 잊히지만 어떤 영화는 관객의 삶 속에 녹아 함께 늙어간다. 각자의 '쇼생크'가 무엇인지, 그곳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던 영화 <쇼생크 탈출>. 무수한 불합리함과 굴레 같은 일상, 혹은 스스로가 만들어둔 마음의 감옥 속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희망은 없다고 시스템에 순응하며 죽어갈 것인가 아니면 위험한 희망을 품고 살아갈 것인가. 우리가 잃어버린 내면의 아리아를 찾아가는 영화 <쇼생크 탈출>이 관객들을 다시 찾아온다.
영화는 석연치 않은 판결로 인해 두 번의 종신형을 받은 한 남자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정확한 증거는 없지만 몇 가지 정황과 앤디의 태도로 인해 그는 죄수복을 입게 된다. 포틀랜드 지역의 큰 은행 부지점장이었던 앤디 듀프레인은 한순간에 아내를 죽인 중죄수가 되어 '쇼생크 교도소'에 입소하게 된다. 레드가 말하는 것처럼 교도소는 "그 순간 실감하게 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예전의 삶은 사라져 버려 과거를 생각해 볼 끝없는 시간만이 남는다"라고. 그렇게 새로운 죄수들은 모든 죄수들의 관심이 대상이 되었고 앤디 또한 자신을 노리는 '보그스'를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교도소는 동화의 나라가 아니었다.
앤디는 그러다 우연히 교도관 헤들리의 이야기를 듣고 '절세' 방법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서류를 처리할 전문적인 도움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한다. 동료 죄수들이 숨죽이며 지켜보던 옥상 위, 앤디는 옥상 끝에 매달리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은행가의 면모를 잃지 않고 거래를 성사시킨다. 그는 함께 작업하던 동료들을 위한 '시원한 맥주 세 병씩'을 요구하며 동료들은 일시적인 '자유'를 맛보게 된다. 마치 감옥의 죄수가 아니라 자기 집 지붕을 고치는 자유로운 일꾼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레드가 추측하기론 간수에게 잘 보이려고도 아니고 친구를 만들려고도 아니고 아주 잠시만이라도 평범한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어서라고 추측했다.
앤디의 방을 검사하던 노튼 소장은 벽에 붙은 여배우의 포스터를 지적하며 앤디의 '경건함'을 시험한다. 소장이 마음에 드는 성경 구절이 있느냐고 묻자, 앤디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오는지 혹 저물 때일지, 밤중일지, 닭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마가복음 13:35)." 이에 만족한 소장이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12)"라고 하자 앤디는 즉각 구절의 출처를 읊으며 소장의 허영심을 완벽하게 충족시킨다. 소장은 앤디를 완전히 길들였다고 믿으며 성경책을 돌려주고 한마디를 남긴다. "구원은 이 안에 있네."
앤디는 그 후로 교도소장을 비롯한 간수들의 자산을 관리하며 '보호'받게 된다. 보그스 일당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보다 안전하고 독립적인 공간인 '도서관'에 배치된다. 비록 소장의 비자금을 세탁해 주는 '검은 회계사'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지만, 앤디는 그 대가로 얻어낸 권한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는 수년간 끈질기게 주 정부에 편지를 보내 도서관 예산을 따냈고 수감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검정고시 합격에도 힘을 썼다. 그리고 앤디는 교도소 전체에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울려 퍼지게 한다. 누구도 그 노래의 가사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아리아가 흐르는 몇 분 동안은 모두가 쇼생크라는 감옥이 아닌 잠시나마 자유의 공간이 되었다. 앤디는 거듭 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자유를 움켜쥔다. 그러던 어느 날, 무죄를 증명할 실마리가 나타나며, 앤디는 비로소 사법 시스템의 오차를 바로잡고 잃어버린 삶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에 부푼다. 하지만 그 희망은 소장의 권력 아래 잔혹한 배신으로 돌아온다. 이 불합리한 감옥 안에서 시스템의 선처를 기다리는 것은 무의미하며, 구원은 오직 스스로의 손으로 쟁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교도소라는 공간의 진짜 무서움은 폭력이 아닌 '익숙함'에 있었다. 레드는 말한다. "처음엔 싫지만 차츰 익숙해지지.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벗어날 수 없어. 그게 길들여진다는 거야." 50년을 복역하고 사회로 나간 까마귀 할아버지, 브룩스의 비극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평생을 보낸 담장 안에서는 도서관장이자 존경받는 노인이었으나, 담장 밖 세상에서 그는 식료품 점원 일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결국 그는 적응하지 못한 채 스스로 삶을 놓아버린다. 레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의도적으로 가석방 심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으며 안주하려 했다. 교도소라는 공간은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지옥처럼 보이지만, 막상 그 견고한 시스템에 길들여지고 나면 저 바깥의 무한한 자유가 더 무서운 법이다. 안에서는 중요한 인물이지만 사회에서는 무력한 낙오자가 되는 현실. 누군가에게 그토록 간절한 가석방은, 길들여진 수감자들에게는 오히려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앤디 듀프레인만은 예외였다. 그는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돌을 다듬으며 담장 밖의 감각을 잊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모두가 시스템에 길들여져 자유를 두려워할 때, 앤디는 그 두려움을 뚫고 나갈 유일한 무기인 '희망'을 갈고닦았다.
앤디의 방 벽면을 장식했던 1940년대의 리타 헤이워드, 1950년대의 메릴린 먼로, 그리고 1960년대의 라켈 웰치. 소장을 비롯한 모두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 공간은 사실 앤디가 긴 세월 동안 준비한 자유의 통로였다. 시대가 변하고 포스터 속 여배우의 얼굴이 바뀔 때마다 앤디는 절망이라는 이름의 벽을 조금씩 허물며 자신만의 지도를 완성해 나간다. 결국 앤디가 떠난 뒤, 레드는 비로소 그가 쇼생크라는 새장에 담아둘 수 없는 존재였음을 깨닫는다. "어떤 새들은 새장에 갇혀 살 수 없어. 그 깃털이 너무나 밝거든." 50년을 복역한 브룩스가 길들여진 까마귀 제이크를 결국 야생으로 날려 보냈듯, 쇼생크라는 거대한 새장은 앤디라는 빛나는 깃털을 품기엔 너무나 좁고 초라한 곳이었다.
결말이 이미 정해져 있지만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은 스포일러의 영화를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쇼생크 탈출> 일 것이다. 성공적인 탈출극을 그려서만이 아니라 절망에 길들여지길 거부한 한 인간의 의지가 어떻게 다른 인간을 구원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중반부를 지나면서 레드가 말했던 '희망'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기도 했다. 말 그대로 희망고문을 하며 동화 같지 않은 감옥 생활에서 동화 같은 '희망'을 찾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앤디는 그 희망을 실현했다. 스스로 '자유'를 쟁취하며 자유로운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 친구를 만나 악수를 하는 일, 태평양이 내 꿈보다 푸르길 꿈꾸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결한지를 보여주었다. 레드는 이제 "희망은 좋은 거예요. 그리고 좋은 것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따라 지후아타네호의 푸른 바다로 나아간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쇼생크 안에서 살아가지만, 앤디 듀프레인이 포스터 뒤에 숨겨두었던 그 찬란한 깃털을 기억하는 한, 우리 역시 언젠가 그 푸른 해변에서 재회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