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다면.

영화 <연지구> 리뷰

by 민드레


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다면 그 시간은 영원할까. 그렇다면 그 시간은 서로의 심장 박동에 맞춰 흐를지도 모른다. 1987년 작 <연지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그려낸 로맨스다. 1930년대의 홍콩, 화려한 유곽의 등불 아래 맺어진 여화와 진진방의 맹세는 '죽음'을 통해 영원을 꿈꿨다. 영원을 담보로 한 그 진심과 맹세는 시간이 지나도 남아있을 테지만 그 끝에 서있는 마음은 그대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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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년대 홍콩, 자욱한 아편 연기와 화려한 치파오의 문양 사이로 흐르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남장을 한 채 무심하게 노래를 읊조리는 여화와 그 찰나의 순간에 매혹된 도렴님 진진방이 마주한다. 부유한 가문의 자제로 태어나 못 가진 것이 없던 진방에게 잡으려 할수록 멀어지는 신기루 같은 여화는 생애 처음 마주한 결핍이자 도취였다. 그렇게 홀린 듯 여화에 빠져든 진진방은 "모두 꿈속의 달처럼 닿을 듯 닿지 않네"라는 말로 그녀를 독점하려 한다. 그는 화려한 꽃바구니를 보내고 유곽의 계단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침대를 선물하며 자신의 재력으로 그 '달'을 소유하려 한다. 그는 자신의 세계를 흔드는 이 치명적인 열망이 영원히 지속될 거라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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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순결을 빼앗기고 삶의 주도권을 잃은 기생에게 사랑은 온전하게 소유할 수 있는 '나의 것'이었다. 유곽의 규칙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여화는 '남자'를 다루는 방법에는 노련했다. 그녀는 남자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주지 않되, 애태울 만큼의 거리감을 유지하며 초반의 주도권을 쥐고 흔든다. 화려한 꽃바구니와 거대한 침대라는 물질적 공세 앞에서도 평정을 유지한다. 하지만 진진방이라는 나약하지만 아름다운 남자의 맹세 앞에서 무너져 내린다. 일찍이 기생이 되어 자신의 삶을 박탈당했던 여화 역시, 이 남자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기생이 아닌 '연인'임을 굳게 믿고 자신의 전부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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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진심은 표현할수록 빛이 바래지기도 한다. 사랑은 낭만을 꿈꿀 수는 있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멀기도 했다. 진진방은 여화를 향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가문의 반대를 뒤로 하고 생경한 일을 택하며 나름의 투쟁을 감행한다. 사랑이라는 거대한 서사의 주인공이 된듯한 '낭만'을 꿈꿨겠지만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현실은 화려한 무대 뒤편 땀 냄새와 먼지가 뒤섞인 분장실 바닥에서 굴러야 했다. 조롱 섞인 꾸지람을 듣고 허드렛일을 해야 했지만 여화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함을 느낀다. 과연 이 남자는 사랑의 낭만과 비루한 현실 사이의 지독한 시차를 견뎌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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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 년의 세월을 건너,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연인을 찾기 위해 여화는 1980년대 홍콩으로 찾아온다. 화려한 유곽의 등불 대신 네온사인과 빌딩 숲이 들어차 더더욱 낯선 이곳에서 여화는 기자 아초와 그의 연인 아정을 만나게 된다.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암호를 신문 광고에 실어달라고 부탁한다. “3811, 그곳에서 기다릴게요. - 여화” 현대의 정보가 쏟아지는 신문 지면 한구석에 박힌 광고는 뜨거웠던 진심과는 대조적으로 차가웠다.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적당한 거리의 사랑을 유지하는 두 커플의 눈엔 여화의 모습은 다소 맹목적이었다. 과거의 약속에 갇혀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승까지 찾아온 그녀의 모습은 무섭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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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했던 뜨거운 사랑의 결과는 예상과는 다르게 초라한 비극을 맞는다. 53년의 시간을 기다려온 여화가 마주한 진진방은 원을 맹세했던 낭만적인 청년이 아니라 영화 촬영장 구석에서 연명하며 과거의 영광을 탕진한 비루한 엑스트라 노인이었다. 1987년, 영국령에서 중국으로의 반환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변곡점 앞에 선 홍콩의 공기는 과거의 굵직한 사랑을 견뎌내지 못한다. 효율과 가성비를 따지며 내일의 안녕을 계산하는 현대적 사랑의 틈새에서 죽음조차 멈추지 못한 여화의 진심은 기괴한 소유욕이자 시대착오적인 유물로 전락한다. 여전히 지배의 홍콩은 지독한 시차로 곪아버린 비극을 앓고 있다. 여화가 진방의 손에 연지구를 되돌려주고 안갯속으로 사라지는 건 배신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자신을 옥죄던 그 지독한 시차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