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의 변주곡, 분노에 찬 악의.

영화 <분노> 리뷰

by 민드레


누군가는 의심에 의해 '배신'당하고, 누군가는 거짓에 의해 배신당한다. 그만큼 신뢰는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불완전함을 안고 있다. 잘못된 것이 아니라 감정에서 비롯되어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이상일 감독의 2016년 작 <분노>는 그 이름만큼이나 서늘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저마다의 내면에 잠재된 분노와 뒤틀린 감정이 변주된 영화다. 영화의 에피소드는 각각 치바, 도쿄, 오키나와라는 세 지역에서 시작된다.


image.png


서곡, 정체 모를 분노와 의심의 시작.


하치오지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이 지독한 여름, 잔인하고 무분별한 폭력의 흔적이 남겨진 현장에는 '분노(怒)'라는 글자가 피로 새겨져 있었다. 그 한자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수사는 미궁에 빠진다. 경찰이 밝혀낸 몇 가지 사실은 범인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각인시킬 뿐이었다. 범인은 두 부부를 죽인 후, 현장에서 태연히 샤워를 하고 음식을 먹어치웠다. 그 후 얼굴을 고치고 연기처럼 모습을 감췄다. 그를 찾기 위해 전국에 그의 얼굴로 추정되는 수배전단이 배포됐고 세상은 보이지 않는 유령을 좇는다. 그리고 그 유령은 우리 곁 어딘가에 이미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돌아온다.


image.png


제1악장, 치바.


아이코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치바로 다시 돌아온다. 유흥가에서 발견된 딸의 삶을 수습한 아버지 요헤이는 안도하면서도 내심 불안하다. 돌아온 항구마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년 타시로가 있었고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수배전단 몽타주는 고요한 항구마을에 닿아 그 불안의 틈새로 청년 타시로를 향했다. 아이코가 말하길 그는 부모님의 빚으로 인해 도망치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의 사정은 수배전단의 조건과 비슷한 모습을 띄고 있었다. 성형으로 얼굴을 고치고 이름을 바꾼 채 숨어 지낸다는 살인마의 행적은 빚 때문에 이름을 숨기고 일당직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타시로의 사정과 겹쳐진다. 그가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아버지에게서 아이코로 조용히 번져간다.


image.png


제2악장, 도쿄


도쿄의 광고 대행사에서 일하며 세련된 도시인의 삶을 사는 유마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드러낸다. 화려한 클럽과 일탈 속에서 한없이 가볍고 자유로워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병든 어머니를 간호해야 한다는 무거운 부채감이 자리 잡고 있다. 그 화려한 소음 속에서도 진정한 사랑을 만나지 못하고 지독한 고독에 갇힌 유마. 그 고독의 틈새로 신주쿠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청년 나오토가 들어온다. 갈 곳 없는 나오토를 자신의 집으로 들이며 유마는 구원자를 자처한다. 나오토의 과거를 묻지 않는 것이 유마에게는 세련된 '배려'였겠지만, 실상은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익명의 존재'다. 점차 깊어지는 두 사람, 나오토는 유마의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한다. 생전 처음 느끼는 안식에 "우리 집 무덤에 같이 들어갈래?"라고 말하며 영원을 약속한다. 하지만 하치오지 사건의 수배전단이 도쿄에도 닿고, 친구의 전화와 수상쩍은 나오토의 행적, 그리고 경찰의 전화가 걸려오자 의심이 확신으로 변한다. 그리곤 유마는 나오토의 칫솔과 컵 등 그가 머물렀던 흔적들을 서둘러 치워 버린다.


image.png


제3악장, 오키나와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오키나와 섬. 엄마와 함께 섬으로 이사 온 이즈미는 우연히 배낭여행자 타나카를 발견한다. 고립된 섬에서 두 사람은 기묘한 유대감을 쌓아간다. 그 곁에는 이즈미는 지켜주고 싶어 하는 소년 타츠야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놀다 사라진 타츠야를 찾던 이즈미는 미군에게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타츠야는 수풀 속에 숨어 그 모든 광경을 목격하고도 공포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지켜주고 싶었던 마음은 비겁한 방관자가 되었다는 지독한 죄책감으로 변했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절망한다. 이즈미는 그날의 일을 가슴에 묻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연신 부탁한다. 그 상처를 비집고 들어온 타나카의 위로는 자신의 비겁함을 조금이나마 씻어낼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image.png


세도시의 비극을 관통하는 주제는 '젊은 세대의 무력감'이다. 치바의 아이코와 타시로, 도쿄의 유타와 나오토, 오키나와의 이즈미와 타츠야. 이들 모두 기성세대가 구축한 사회 시스템에 밀려나 그늘에 몸을 숨겼다. 특히 오키나와의 이야기는 이 무력감을 가장 분명하고 잔인하게 드러낸다. 이즈미가 끔찍한 일을 당하던 그 순간, 현장에는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그 직전까지 시위대가 거리를 가득 메우며 미군 철수를 외쳤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사회적 연대는 '부재중'이었다. 아무리 외쳐도 이루어지지 않는 '미군 철수'와 같은 사회적 문제나 폭력과 같은 개인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게 학습된 무력감은 아무리 분노하고 울부짖어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아무 죄 없는 이를 살해한 그의 '사정'을 알아줄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이 사회가 불완전한 채로 분노를 방치하고 오히려 키우고 있다는 점에서 이 비극의 공범은 우리 모두일지도 모른다.


image.png


외지인이자 이방인인 이들에게 마음을 내어준 이유는 '익명의 다정함'에 기댈 수밖에 없는 그들의 고립된 처지 때문이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나의 결핍을 '보호'라는 명목으로 재단하고, 잊고 싶은 과거를 환기시킨다. 계속해서 재현되는 과거에서 빠져나와 과거도 이름도 뚜렷하지 않은 '이방인'은 나를 선입견 없이 바라봐주는 도피처가 되어주었다. "너에겐 소중한 게 지나치게 많아. 정말 소중한 건 늘어나지 않고 점점 줄어들어."라는 말처럼 소중한 것을 지키겠다는 명분이 가장 소중한 사람을 단 한 번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반면, 무조건적인 신뢰가 오히려 모든 의심을 거두어 가버려 '배신'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기도 한다. 분노에 찬 악의는 순수한 신뢰를 올곧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더럽히며 조롱하기 때문이다.


image.png


영화의 전개는 조금씩 '남자'를 의심하게 되는 구조로 이어진다. 범인의 특징은 세 사람의 얼굴과 절묘하게 겹쳐 보이며 용의자의 범위를 넓힌다. 특징이라면 타인에게 이해받기 힘든 사정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자세한 사정을 밝히기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실 살인범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확신으로 변해가는 과정에 초점을 둔다. 그렇게 범인을 잡는 카타르시스가 아닌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을 잃게 되는 배신에 대한 '감각'을 느끼게 만든다. 마음속에 의심의 씨앗이 싹트는 순간,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주체가 아니라 자기 안의 불안에 잠식된 마음의 노예가 된다. '분노(怒)'라는 한자처럼 그 마음(心)에 휩싸여 종(奴)처럼 자유를 잃게 되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세상 곳곳에 의심을 심은 이는 '악의'를 완성시켰고 우리 안의 불신을 먹고 자라 마지막 획을 긋는다. 결국 우리는 구원하는 것은 불신을 견디고 분노를 막아내는 신뢰와 사랑뿐임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