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저주> 리뷰
첫 화면부터 심상치 않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기괴한 비주얼이나 신체가 분리되는 이미지는 다소 충격적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을 더욱 서늘하게 해 줄 영화로 화면 너머의 관객의 안락함을 파괴한다. 과연 전주국제영화제 불면의 밤 섹션에 걸맞은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도쿄의 미용사 리코는 습관적으로 sns를 켠다. 올라온 게시물을 보던 중, 친구 슈펀의 게시물에 섬뜩한 저주의 글이 남겨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기 위해 용기를 내 전남자친구 자호에게 전화해 물어보니 슈펀은 이미 6개월 전에 사망한 상태였다고. 그렇다면 누가 슈펀의 sns에 게시물을 올리고 있는 걸까? 친구 아리아는 장난치지 말라고 dm을 보내고 슈펀에게 악성댓글과 영상을 받게 되면서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영화는 여기서부터 관객을 로그아웃할 수 없는 지옥으로 끌어들인다. 별거 아닌 장면에도 긴장하게 만들고 조금씩 생겨나는 두려움은 공포를 유발한다. 어디에서 시작된지도 모를 악의의 연쇄는 도심을 조금씩 주술적 기운으로 물들이기 시작하며 저주의 소용돌이로 관객을 끌어당긴다. 누가 죽은 슈펀의 계정으로 저주를 퍼뜨리고 있는 걸까. 리코는 친구의 죽음을 추적하기로 결심했지만 자신 또한 태그 된 죽음의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단순 해킹이나 장난이 아닌 것이다. 누구에게도 감히 알릴 수 없는 저주는 명백한 악의에서 출발하여 더욱 집요하고 실재적이다.
영화의 가장 기괴한 지점은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함에도 스마트폰에서 손을 놓지 못하는 모습이다. 저주의 실체를 목격하고 죽음이 발밑까지 차오르는 순간임에도 스마트폰의 액정에 손이 가있다. 연결되어 있지 않은 그 구간에서 소외를 느끼는 현대적 강박은 파멸의 통로로 이어진다. 영화의 저주는 주술 자체보다 자극적인 것에 열광하는 우리의 욕망을 먹고 자란다. 타인의 불행을 전시하고 소비하며 타인의 행복 앞에서 혐오와 시기를 쏟아내는 SNS의 생태계야말로 저주가 서식하기 가장 좋은 비옥한 토양이다. 저주가 피드에 떠도 스크롤을 멈출 수는 없다.
과거 <링>의 사다코가 비디오테이프에 담겨 TV 브라운관을 뚫고 나왔다면, 2026년의 <저주>는 알고리즘을 타고 우리 손 안으로 흘러든다. 디지털 시대의 저주는 원치 않아도 피드에 뜨는 것뿐만이 아니다. 가장 큰 저주는 그 중독성에 있다. 기쁜 순간에도, 슬픈 순간에도 심지어는 위기의 순간에서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는 건 sns일까, 아니면 그 화면을 끝내 놓지 못하는 우리의 손일까. 끊어낼 수 없는 저주의 네트워크는 현대판 '디지털 카타시로'가 되어 우리의 실재를 위협한다. 카타시로란 죄와 부정함을 옮겨 담는 일본의 종이 인형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클릭 한 번으로 손쉽게 태그 되는 세상에서, 저주는 알고리즘을 타고 정확히 도달한다. 그렇게 디지털 카타시로는 완성된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SNS를 지우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일상적으로 기록했던 이야기들은 저주의 매개체가 되고, 서서히 일상을 잠식한다. 영화는 전형적인 점프 스케어로 공포를 자극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심리 스릴러의 긴장감으로 전방위적인 압박감을 채우고, 오컬트적 주술로 기괴함을 더한다. 초자연적 현상이라기엔 그 악의의 집요함이 너무나 인간적이라 더욱 잔혹하다. 저주를 퍼뜨린 자가 추는 환희의 춤사위와 끝내 로그아웃하지 못한 채 타인의 불행을 박제하는 것 중 진정 더 삿된 것은 무엇인지 구별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