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비: 시비레> 리뷰
볼을 꼬집어봐도 이게 꿈이 아니라면 그건 아마 잔인한 현실의 증거일 테다. 인생의 첫 감각이 '온기'가 아닌 '폭력'이라면 그 삶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음을 알린다. 몸은 기꺼이 기능을 마비시켜 본부를 방어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일상과 멀어지며 어느 누구도 붙잡아주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소년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법은 우치야마 다쿠야 감독의 <마비: 시비레>에서 이어진다.
영화는 폭력에 방치된 한 소년을 비춘다. 폭압적인 아버지에게서 벗어났지만 어머니는 아타치를 보호하는 대신 방치했다. 아이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학교 대신 거리를 전전하며 식재료를 훔친다.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스스로 생존을 위해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니는 상황은 방치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이었다. 소년은 점점 보통의 일상과는 거리가 멀어지지만 벗어날 방법은 없다.
그 마비된 일상에 익숙해진 소년은 그 결핍의 외피를 제 몸을 지키는 방어막으로 삼는다. 사실 결핍은 소년의 일부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음에도 더 큰 폭력의 통증을 잊게 만들었다. 하지만 참담하게도 그에게 도움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년의 유일한 세계이자 친구였던 이반조차 이 세계의 외곽으로 무력하게 밀려나고 만다. 지켜줄 이도, 기댈 곳도 없는 벼랑 끝에서 소년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언어의 상실은 의지와 다르게 회복할 수 없었고, 심리적 트라우마는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킨다.
영화는 먹먹함보다는 갑갑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 결핍이 자신을 갉아먹는 감각의 끝엔 해피엔딩은 없음을 예감했었다. 결핍은 유전되는 것도, 답습되는 것도 쉽기 때문에 소년이 마주할 어른의 시간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 영화는 그 예감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확인시켜 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명치를 누르는 압박감으로 갑갑해진다. 그로 인해 울렁거리고 멈춰지지 않는 구역질은 현실 때문일까. 스크린이라는 안전한 경계선을 넘어 관객의 감정을 끊임없이 침투한다. 보통의 영화들이 폭력적인 상황 이후에 안전한 회복을 이야기하며 관객에게 일종의 면죄부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반면, 이 영화는 정직한 방식을 택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 역시 방치된 아이들을 담았지만, 그 영화는 끝내 먹먹한 여백을 남기며 관객이 스스로 슬픔을 완성하게 했다. 반면 〈마비: 시비레〉는 그 여백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슬픔을 느낄 틈도 없이 다음 폭력이 밀려오고, 관객은 소년과 함께 감각이 닫히는 과정을 고스란히 체험하게 된다. 먹먹함보다 갑갑함이 먼저 오는 건 그래서다. 이 영화가 더 참혹하게 느껴지는 건 물리적 폭력 때문이 아니라, 그 폭력이 한 사람의 내면을 어떻게 조용히 잠식하는지를 너무도 강렬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심리적 타격이 물리적 타격보다 훨씬 오래, 훨씬 깊이 남는다는 것을 이 영화는 안다. 그리고 그것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넘긴다. 고통은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쌓이며, 상처는 아무는 게 아니라 마비시키는 것임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