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잊은 아침에 일갈하는 여명의 잔상.

영화 <창백한 언덕 풍경>

by 민드레


시간은 흐르고 시대는 끊임없이 변한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개인의 선택에 달렸다.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 또한 받아들여야 함은 변함없는 사실일 것이다. 영화 <창백한 언덕 풍경>은 어쩔 수 없다 치부하고 묻어두었던 누군가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부문' 초청작이자 원작자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데뷔 소설을 원작으로 해 활자 속에 남아있는 기억의 파편을 드러낸다.



image.png


영화는 1980년대 영국의 어느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시작된다. 중년이 된 에쓰코는 첫째 딸 게이코를 떠나보낸 뒤, 악몽에 시달린다. 그녀를 찾아온 둘째 딸 니키는 엄마의 기억에 궁금증을 가지고, 에쓰코가 슬픔을 외면할수록 그 기억은 더욱 선명해진다. 하나둘씩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회상은 미처 지우지 못한 현실을 들춰낸다.



image.png


카메라는 에쓰코의 시선을 따라 30년 전의 나가사키로 고개를 돌린다. 1950년대, 나가사키. 원폭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이곳에서 젊은 날의 에쓰코는 곧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며 정적인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 강 건너 오두막에 머무는 모녀, 사치코와 마리코를 만나게 된다. 전쟁의 상흔을 뒤집어쓴 사치코는 미국으로의 탈출을 꿈꾼다. 이 기묘한 복선은 현재와 비극과 맞닿은 복선일까. 에쓰코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고백일까.



image.png


떠올릴수록 불확실한 기억의 정체는 그릇된 것이 아니라 잊고 싶었던 평범하지 않은 삶의 대비다. 그것이 농도 짙은 낙인이든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이든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영화는 1982년 영국과 1952년 일본의 시선이 뒤섞이며 과거와 현재를 대비한다. 의도적으로 불편한 불일치는 나가사키를 기점으로 뻗쳐져 있는 불안정함을 따라가고 있다. 전후 원폭으로 인한 피해자와 그에 대한 낙인, 제국주의에 앞장섰던 이들에 대한 비난과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는 이 시대가 얼마나 혼란스러운지를 비춰주는 장면이었다. 그만큼 제국주의의 결과물은 그토록 비참하고 개개인의 정체성과 기억을 도려내는 일이었다.


image.png


영화가 겨누고 있는 지점은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고통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절을 겪지 않은 사람들의 남겨진 기록과 왜곡된 기억 앞에서 마땅히 부끄러워하며, 그래야만 하는 우리의 이야기로 수렴된다. 그들은 이미 현재를 살아가며 변화를 수용하고 성찰해야 하는 것이었다. 반성하지 않는 과거, 창피해하는 현재라는 과도기를 지나 혼란을 겪지만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마 그건 이미 큰 태양을 경험하고 여명을 받아들이지 못해 일어난 일이 아닐까. 과거의 제국주의 그 수많은 찬양과 여전히 이어지는 왜곡은 일본으로 하여금 더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매듭짓지 못한 속죄는 여전히 창백한 언덕 위에 피어나야 할 진실의 아침을 가로막는다.


image.png


사치코와 마리코 모녀는 지나가는 엑스트라가 아니다. 에쓰코가 자신을 투영한 거울이자, 그녀가 끝내 직면하지 못한 미래의 초상이다. 미국으로의 탈출을 꿈꾸며 현실을 외면한 사치코처럼, 에쓰코 역시 불안정한 방황과 선택으로 자신의 공허함을 메우려 했다. 그 균열은 고스란히 게이코와 니키에게 전해졌다. 마리코가 사치코의 불안을 물려받았듯, 게이코는 에쓰코의 침묵을 유산으로 받은 것이다. 그렇게 어떤 것도 매듭짓지 못한 결말은 '죄'를 묻는 비난으로 이어진다. 누군가에게 지워지지 않는 낙인은 불안정함의 유전으로 이어져 '결핍'이라는 뒤틀린 모양새로 대물림된다. 에쓰코가 마주한 창백한 언덕의 풍경은 결핍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도망칠 수 없는 현실은 그녀에게 있어서 감당할 수 없는 이름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