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찬사 속 뜨거운 욕망과 싸늘한 기만.

영화 <나의 사적인 예술가> 리뷰

by 민드레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삶을 꿈꾸지만, 그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켄트 존스 감독의 <나의 사적인 예술가>는 바로 이 지점,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정직하게 응시한다. 모두가 열망을 따라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꿈'은 닿지 못하는 '꿈' 그 자체로 남는다. 그 끝에서 낭만을 좇아 성취를 이룰 것인지, 아니면 비루해 보일지언정 발 딛고 선 현실을 받아들일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 현실을 수용하는 삶 또한 결코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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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에서 일하며 일상을 살아가던 에드 색스버거. 반복되는 일상을 살던 그에게 어느 날 윌슨 마이어스라는 청년이 찾아온다. 그는 에드가 오래전 펴냈던 시집 <너무 지난 길>에 매료되었다며, 그 시들이 마치 어제 쓴 것처럼 현대적인 생동감과 신랄함, 그리고 시대적 반성을 담고 있다고 찬사를 보낸다. 생전 처음 마주하는 뜨거운 반응에 에드는 얼떨떨하면서도, 자신을 '시대의 아이콘'이라 칭송하는 젊은 예술가 무리에 합류하며 잊고 지낸 감각에 눈을 뜬다.


하지만 끝내 그는 글을 완성하지 못한다. 그는 청춘을 그리워한 걸까. 배고픔보다 낭만을 좇았던 과거의 자신을 그리워한 걸까. 나는 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이스를 향해 흔들리던 마음이나 청년들 틈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맞추려 애쓰던 들뜬 감정, 직장동료에게 쏟아낸 날 선 분노가 그 증거다. 그 화는 자신의 작품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라기보다 자신이 속한 '늙고 비루한 현실'에 대한 격렬한 거부감이다. 청춘은 이미 손에 잡히지 않는 허상이며 그 괴리감은 문장을 매듭짓게 할 동력을 앗아가 버렸다. 그는 이미 청춘의 중점에서 벗어나 우체국의 먼지 쌓인 책상과 낡은 육체의 현재에 놓여있었다. 자신의 늙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에드의 마지막 저항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는 걸까.


영화에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레이스'다. 배우라는 직업은 삶과 연극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에드를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그녀는 에드에게 시적 영감을 주는 뮤즈이자 생동감 있는 세계를 증명하는 욕망 그 자체다. 그녀와 교감하는 순간엔 마치 자신이 청춘의 중심에 있는 것 같은 달콤한 착각에 빠진다. 매혹적인 시선과 호의는 진심 어린 흠모보다 사람의 마음을 능숙하게 흔드는 배우로서의 관성적인 몸짓에 가깝다. 남자의 시선을 끄는 건 어필이 아닌 직업의 기술이다. 연기와도 같은 에드의 존재는 그녀의 연극에서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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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의의 사회' 청년들은 자신과 자신의 글을 알릴 방법을 치열하게 고안한다. 에드가 제안한 낭독회도 그중 하나였다. 휴대폰과 SNS의 중독성, 자극과 전시만이 남은 세태를 비판하는 그들답게 홍보 방식도 색달랐다. 그들은 과거 시대를 존경하며 택한 '에드'를 치켜세운다. 그들에게 에드는 바로 그 현대적 가벼움에 저항하는 상징이자, 자신들은 '진짜'를 향유한다는 의식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낭만은 너무 빠르게 그 밑천을 드러낸다. 그들이 비판하던 SNS의 '좋아요' 문화처럼 과거 시대의 '지성'을 소비할 뿐이었다. 텍스트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텍스트를 향유하는 '나'의 모습에 취한 위선이다. 그들이 그토록 혐오하던 현대사회의 가벼움보다 훨씬 더 비겁하고 그릇된 기만이다. 사실 관객뿐만 아니라 에드는 처음부터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아슬아슬하게 핀트를 벗어난 채 그의 글을 칭송하던 청년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던 묘한 이질감 말이다. 어리둥절한 표정과 '유명한' 아는 시인이 없냐는 질문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단 한 번도 그의 시를 읽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무관심의 숭배의 말로다.


본질이 사라진 시대에서 텍스트의 본질을 읽지 않는 이들의 찬사는 무의미하다. 이 기만적인 소동극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결국 이 모든 것이 소용없는 일이 아닌가'라는 허탈함이 밀려온다. 나 역시 어느덧 글자보다 영상에 익숙해진 시대의 흐름에서 끊임없이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자문하게 된다. 과연 닿지도 않을 진심을 문장으로 옮기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감독은 그 허무 속에서도 카메라에 감정을 담지 않는다. 진짜 시인의 목소리와 그 시가 잉태된 시대의 공기, 청년들이 끝내 놓쳐버린 그 행간, 화려한 조명을 걷어낸 자리에 남는 에드의 남루한 우체국 일상을. 그리고 인물의 얼굴을 묵묵히 비춘다. 기존의 영화 방식처럼 모든 것을 보여주기보다 사유하게 만든다.


영화 <나의 사적인 예술가>는 바로 이 지점,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삶의 모순들을 정직한 프레임 안에 담아낸다. 감독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근원적인 외로움과 '낭만'이라는 이름의 이상이 가진 위태로움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이상' 그 너머의 현실과 그 민낯을 숨김없이 직시하게 만든다. 부유한 청춘들의 우아한 낭만과 에드의 거친 현실이 대비되며 잇따른 파열음을 낸다. 우리가 좇는 낭만은 과연 누구를 위한 기만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