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행을 떠난다 - 준비(1)

신혼집의 물건들을 정리하다

by 민은 민들레

쿨 하게 로마에 간다고 했지만, 실제 비행기 티켓을 끊을 땐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미친 거야. 우리 정말 미친 거야. 이건 정말 미친 짓인데? 끊어? 정말 끊어?"


"안 되겠어. 도저히 마우스를 못 누르겠어. 악. 이거 정말 눌러?"


"아아악. 눌렀어! 눌렀어! 끊었어!! 티켓 사버렸다고!!!"


우린 세상 호들갑을 떨며 티켓을 결재했다. 로마에 가는 것 자체도 신났지만, 그로 인해 시작될 긴 여정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에 우린 클릭을 해낸(?) 순간 이후에도 한참 호들갑을 떨었다. 그 순간의 희열에 잠겨 우린 긴 여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여느 때와 같이, 새로운 것을 구매한 후 신나는 마음은 이틀 이상 가지 않는다. 티켓 구매의 희열이 가니 현실이 우리를 엄습했다. 일단 짐을 다 정리해야 했다.


신혼집 살림. 두 명이 처음으로 함께 산다는 신나는 마음으로 장만한 그 모든 것들. 가구, 가전제품, 우리의 경우엔 집을 저렴하게 꾸미겠다고 열심히 그린 유화와 아크릴화 (및 도구들), 그리고 나의 수많은 악기들과 반년 간 일 꿔 온 내 방에 있는 채소밭.


이 모든 걸 어떻게든 처분해야 한다는 생각에 첫 충격이 왔다. 딱히 큰 가치가 있어서 그렇다기 보단 그 사물 하나하나에 새겨진 신혼의 설렘과 추억들, 축하하는 마음으로 준 사람들의 마음, 그리고 하나씩 우리 손으로 만들어 온 성취를 순간에 다 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캐리어에 다 넣어갈 순 없다.


그렇게 반강제적인 미니멀리즘을 겪게 되었다. 그 이후, 난 하지도 못 하는 라트비아어와 러시아에 꾸역꾸역 영어를 섞어가며 중고장터에 60개 정도의 물건을 팔았고, 아내는 출퇴근하면서 25개 정도를 팔았다. 가구는 싹 리스트에 적고 새로 산 가격을 적어서 집주인에게 그 가격의 50%에 넘기겠다는 오퍼를 하니 흔쾌히 동의하더라. 러시아인들의 쿨함은 이럴 때 정말 좋다. 그 덕에 가는 날까지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게 됐다.


가구라는 필수 여건을 확보한 후 두 달 동안 거의 매일 한두건 씩 물건을 팔았다. 분명 다 한 때 필요하다고 산 것들일 텐데 신기하게도 물건을 팔아도 생활에 불편함은 전혀 없었고, 더 신기한 건 팔아도 팔아도 정리할 물건은 끊임없이 나왔다. 쓸데없는 곳에 경쟁심 느끼기 대장인 나는 짐과 나의 승부가 누구의 승리로 끝나는지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열을 올려 팔았고, 물건이 없어질수록 희열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니멀리즘에 중독된다는 말이 이런 걸까.


실제로 사는데 생각보다 많은 게 필요하지 않았다. 노트북으로 바꾸고 나니 작업용 컴퓨터가 꼭 데스크톱일 필요도 없었고, 에어프라이기 없이도 요리는 가능했고, 쓰지도 않는 옛날 노트북과 카메라들을 쟁여놓을 필요도 없었고, 방에 농장을 키울 필요도 없었다. 아, 농장은 당연한 거지?


결정적으로 아내의 피 나는 노력 끝에 우리 옷장의 90%를 정리했다. 반 정도는 기부하고, 나머지는 친척과 지인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것은 재활용했는데, 대략 이민가방 6개 정도 나오더라. 실제로 비우는 데 이민가방을 썼기에 이 측정이 매우 정확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아... 탄소 발자국이 우리 같은 사람들 얘기 맞구나. 우리가 긴 여행을 가는 게 아니었다 해도 이 중 우리가 실제 입는 옷은 몇 개나 될까.


아내에겐 '옛날 옷을 버리고 로마 가서 예쁜 거로 사자'로 옷과의 이별을 정당화시켰고, 난 여러 개의 저렴한 옷 보다 한 벌 좋은 옷을 사자는 마인드로 새로 무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안하다 스웨덴 H사... 그동안 고마웠다.


글을 쓰면서 아내에게 물었다. 여행 준비하면서 우리 삶을 떠나게 된 것들 중 가장 큰 것을 꼽자면?


1초 고민도 안 하고 대답한다. "직장."


하긴, 첫 직장을 여행으로 인해 그만두게 됐으니 그럴 만도 하다. 첫 직장부터 퇴사 사유 및 포부가 '장기여행 및 창업'이라니. 그 나름대로 멋있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비움의 연속에 물건을 하나하나 포기하는 것이 어느덧 일상이 되었지만, 끝까지 안타까웠던 물건들은 있다.


아내는 일리 커피머신을 정말 아쉬워했다. 창의적인 인스타그램 포스트를 하면 경품을 준다길래 나는 작곡을 하고 아내는 영상을 찍어 올려서 따낸 커피머신이었다. 그동안 매일 일일이 갈아서 모카폿으로 커피를 내리던 우리에겐 너무나 큰 행복이었기에 아내는 커피머신을 팔고 하루 종일 우울해했다.


나는 이케아 곰돌이가 가장 아쉬웠다. 뱃살이 불뚝 나오고 게을러 보이는 거대한 곰인형에 우린 당연히 동질감을 느껴 바로 집에 데려와 '보리스'라고 이름을 지어줬었다. 코로나와 락다운, 그리고 추운 나라 특유의 무뚝뚝함 속에 나도 모르게 소파 위에 게으른 모습으로 앉아있는 보리스에게 감정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나 보다. 끝내 못 팔고 장인어른께 맡기고 왔다. 약간 과장하자면 보리스를 다른 곳에 '입양' 시키는 순간 장인어른과 친척들이 아이를 버린 사람 마냥 취급할 것 같아 그런 것도 있다. 한동안 아내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안부전화가 "보리스는 잘 있니?"로 시작했을 정도니.


[업무 과로사 st. 보리스]


그렇게 살림을 처분하고 나니 모순적으로 사야 할 것들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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