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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월 Mar 08. 2023

왜 우리는 인색할까?

-수행이 필요해


길고양이 레몬이 집에 왔을 때의 일입니다. 처음 왔을 때는 야리야리하던 녀석이 제법 체격도 커지고 몸무게도 늘어, 거실을 활보할 때는 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는 것처럼 의젓합니다. 창문 밖 세상에 관심이 많은 녀석을 안고 구경을 나갈라치면 묵직한 무게감에 오래 안고 있으면 팔이 아플 정도입니다.


처음 올 때와 마찬가지로 녀석은 여전히 말썽꾸러기입니다. 올라갈 수 없다고 본 책장 꼭대기의 책을 발로 치워가며 오르고, 경사지고 미끄러운 부엌의 레인지 후드까지 정복을 마친 상태입니다. 이미 에어컨, 스타일러는 가벼운 등반 코스가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녀석은 가족들이 식사를 할 때 자기 밥을 일찍 먹어치운 후에 전자레인지 위로 뛰어올라 자리를 잡고 앉아, 가족들이 어떻게 숟가락질을 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내려다보며 감시합니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이러한 감시활동을 계속하다가 심드렁해지면 녀석은 베란다에 있는 화초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행운목과 산세베리아를 껴안거나 할퀴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화분을 밀어트려 와장창 작살을 내기도 합니다. 그 소리에 놀라 짐짓 동그랗게 눈을 뜨지만 곧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구석으로 사라집니다.

 

이 같은 레몬의 횡포는 끝이 없습니다.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에 올라가 먹통을 만들고, 비닐 가죽으로 된 말랑말랑한 자전거 안장, 적외선 족욕기를 날카로운 발톱으로 후벼 파서 볼품없이 만들어버리고, 쌓아 놓은 책을 타고 넘어가면서 무너뜨려 매번 다시 쌓게 만듭니다.


여전히 밥때가 되면 제일 만만하고 자비로운 사람을 골라 아주 얄미울 정도 물면서 자신의 밥그릇을 채워주기를 재촉하고, 밤이든 새벽이든 인기척이 느껴지면 귀신같이 알고 나와서  기다란 몸뚱이로 발목을 감아 돌면서 간식을 내놓으라고 시위를 합니다.

 

고맙게도 녀석이 조용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잠잘 때와 밥 먹을 때입니다. 특히 밥 먹을 때에는 머리를 쓰다듬어도 먹는 것에 집중하느라 개의치 않다가 먹는 의식을 마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개를 돌려 물려고 달려듭니다.

  

딸아이가 녀석의 이런 못된 버릇을 고쳐주려고 야단을 쳐보지만, 회복탄력성이 탁월하여 금세 똑같은 짓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되풀이합니다. 한마디로 구제불능 수준입니다. 강아지와 달리 고양이는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말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가족들 모두 레몬에게 번번이 완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는 건 피할 수가 없습니다. 당장 혼이 나도 금세 잊어버리는 태생적 특성을 어찌 이길 수 있단 말인가요.


그런데 이런 말썽쟁이와 한 집안에 살면서도 불평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게 신기한 노릇입니다. 고양이 털이 날리는 걸 몸서리칠 정도로 싫어하던 아내나 장모님도 레몬의 기행을 두고 화를 내거나 진저리치지 않고 가볍게 넘기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관대한 태도는 경의로울 따름입니다. 두 사람의 태도와 행동 변화를 가져온 비밀은 무엇일까요.

 

제 나름 형식 없는 수시 인터뷰와 관찰을 해본 결과, 놀라운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고양이는 원래 그러려니 하며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라면 야단을 치고 바른 길을 알려주고 바로잡으려 하겠지만, 고양이는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는 데다 말이 안 통하고, 무엇보다 이 모든 기행이 고양이의 생태적 특성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짓거리라는 걸 이해하고 수용한다는 겁니다. 때문에 레몬에게 형사책임을 묻거나 민법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의지도 방법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게 관대함과 인자함을 보이는 이유였습니다.

 

이를테면 고양이는 원래 야행성이어서 밤 11시 이후에 활동력이 왕성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사냥구역 생활구역을 나누는 습성이 있어 날카로운 발톱으로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고, 야단을 맞아도 3초 안에 혼내지 않으면 새카맣게 모르기에 같은 짓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음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 쌓아놓은 책을 무너뜨려도 오케이, 아끼던 화분을 산산조각을 내도 오케이, 고가의 실내 자전거를 망가뜨려 당근마켓에도 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도(물론 속상하긴 해도) 오케이 하며 허용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레몬은 치외법권 지역에 살면서 면책 특권이 주어진 특별한 케이스라고 할 겁니다. 이것은 고양이를 길러본 사람이라면 모두 인정할 겁니다.


생각해 보면 고양이만 이런 특유의 습성을 가진 건 아닐 겁니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다 같은 사람이라 해도 결이 다르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다르고, 내향, 외향이 다릅니다. 그뿐인가요. 사는 지역도 피부색도 종교, 문화도 다르고 가치관, 사고방식 또한 다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특유의 습성을 이해하지 않고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서슴없이 자행할까요. 왜 철천지 원수가 되는 걸까요. 고양이에 관해선 톨레랑스를 발휘하면서 같은 사람에겐 왜 그렇지 하지 못하는 걸까요. 왜 가족이나 동료의 고유한 특성을 인정하고 허용하는 것에는 이리도 인색할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길고양이_레몬

#톨레랑스

#왜우리는인색한가

#수행이필요해

#명상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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