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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월 Mar 07. 2023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수행이 필요해


어느 날 스승이 자신이 가르치던 네 명의 제자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해 미션을 내립니다.  그 미션은 먼 곳에 있는 배나무를 보고 온 뒤에 보고 느낀 걸 말하는 겁니다. 단 계절마다 한 명씩 다녀와야 합니다. 제자들은 스승이 내준 과제에 담긴 의도가 뭔지 몰랐지만 시키는 대로 계절마다 배나무를 향해 떠났습니다.


겨울이 되자 첫 번째 제자가 배나무를 보러 갔습니다. 제자는 헐벗고 초라한 나무를 보고 실망한 채 돌아옵니다. 제자는 스승에게 나무가 못생긴 데다 굽고 쓸모없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스승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두 번째 제자는 봄에 떠났습니다. 그는 보고 돌아와서는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지만, 열매가 없어 가치가 없다고 답합니다. 세 번째 제자는 여름에 떠났는데, 배나무가 흰 꽃으로 뒤덮여 있고 감미로운 향기가 났지만 열매를 깨물어 보니 써서 먹을 수가 없었다고 털어놓습니다.


가을에 떠난 마지막 제자가 돌아와 보고한 것은 앞선 제자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가지마다 황금빛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데다 과즙이 풍부하고 맛있어, 자연의 신비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고 흥분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제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스승은 “너희들이 본 게 모두 옳다”고 치하한 뒤, 왜 이런 과제를 냈는지를 설명합니다. 스승은 제자들이 자신과 타인에 대해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면서, 그렇게 할 때 스스로 갇히거나 단절되지 않은 채 매 순간 신선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어 스승은 사계절마다 다른 모양새를 띠지만 같은 배나무라며, 자신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이 겪는 한 계절의 고통만 보고 나머지 계절들, 즉 다른 면들이 지닌 가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합니다. 제자를 아끼는 스승의 마음이 오롯이 느껴집니다. 이 이야기는 류시화 시인이 엮은 인도우화집에 나오는 우화 중 한 편입니다.


이 우화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변하는 존재이므로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일반화의 오류를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보통 우리는 누군가가 보여준 말과 행동을 가지고 그 사람의 됨됨이를 평합니다. 그런데 이 평가가 완벽하냐 하면 그렇지 않죠.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만 가지 이유를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일부만 보고 그 사람 전부를 안다고 퉁치는 것은 올바른 평가도 아니거니와 실수하기 딱 좋습니다.


운 좋게 그 실수를 바로잡는 기회를 얻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자에게 큰 실례를 범하게 되고, 어이없는 피해자를 만들게 됩니다. 강심장인 사람이야 남들이 뭐라 하건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 남들의 평가에 예민한 사람은 이때의 평가가 낙인이 되어 평생 지워지지 않는 가슴의 멍이 됩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누군가를 제대로 안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어느 수준, 어느 깊이까지 알아야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랜 세월 같이 산 부부들조차 성격차이로 갈라서는 판국에, 앎의 깊이를 제대로 가늠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입니다. 심연과 같은 인간을 누가 감히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아주 일부, 그중에서도 내 프레임에 걸린 것만 이해하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내 안테나에 잡히지 않은 건 미지의 영역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까운 사람이라 해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다고 고백해야 할 겁니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얘기의 다른 표현일 수 있습니다. 혹여 잘 안다고 자부해도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기에 솔직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저는 당신을 모릅니다,라고 하는 게 진실에 더 가깝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순간 오만의 감옥에 갇힙니다. 동시에 그 누군가의 가치는 평가절하됩니다. 안다고 하는 사실이 자신감을 높여 줄지는 모르지만, 상대에 대한 경외감은 사라지게 됩니다. 흥미를 끌기보다는 감각을 무디게 하고 닫아버립니다. 이 때문에 크고 작은 신선한 기쁨과 감동을 삶에서 추방시켜 버립니다.    

  

하버드대 심리학과 엘렌 랭어 교수는 마음챙김을 새로운 인식, 개방된 태도라는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그녀가 정의하는 마음챙김은 “바로 앞에 있는데도 몰랐던 모든 경이로운 것들을 알아차리며 현재를 충실히 사는” 심리적 원리로 봅니다. 이를 보여주는 실험 중에서 음악과 관련된 그녀의 실험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유명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과거에 가장 감동적이었던 곡을 그때와 같이 똑같이 연주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두 번째 연주에서는 같은 곡이지만 변화를 주어 연주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 다음 관객과 연주자들을 대상으로 어떤 연주가 더 좋았느냐고 묻습니다.


실험 결과, 관객들은 두 번째 연주, 즉 변화를 주어 연주한 공연이 더 감동적이었다고 응답했습니다. 연주자들도 다르지 않았죠. 클래식음악 세계에서는 악보를 철저히 준수해야 하는 만큼 연주상 큰 변화를 주긴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작은 변화, 새로운 시선으로 해석한 연주를 감동적이라고 평했다는 건 어떤 연유일까요?


안다, 알고 있다는 건 호기심을 떨어트리고 멀어지게 합니다. 새로운 걸 찾으려는 마음을 차단합니다. 첫 번째 연주에서 연주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호기심과 열정 없이, 전과 똑같이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연주에서는 의도를 가지고  새롭게 곡을 해석하며 변화를 주려고 시도합니다. 그 작은 변화가 연주자도 관객도 달라진 소리를 알아차리게 된 것이죠.


따라서 무언가를 안다고 할 때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모르는 게 약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새로운 걸 배우지 말라거나 우리가 아는 지식이 한 푼의 가치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안다는 것이 지니는 심리적 함정을 지적하는 겁니다.


당신은 당신의 아이, 남편, 아내, 애인을 모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게 솔직하고 정당합니다. 잘 안다면 가족 간에 벌어지는 싸움과 갈등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실상은 모르면서 안다는 몇 개의 조각 정보로 오해흫 낳고 싸움을 하 기도 합니다.


하여 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당신을 모르니,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하려고 합니다. 그 덕에 당신을 새롭게 알아가는 재미와 설렘을 얻을 수 있다면, 당신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을  ‘쌩깐다’는 얘기는 아니니 오해는 말아주세요. 대신 당신도 그렇게 해 주세요. 나를 안다는 사실을 내려놓고 모른다는 마음으로 대해 주세요. 이로 인해 당신과 내가, 건강한 긴장이 주는 경이로움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면 백 번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을 정말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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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챙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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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움

#나는당신을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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