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작가이자 비평가이면서 기독교 변증가인 C. S. 루이스는 대중들을 위해 기독교 사상을 쉽게 풀어쓴 작품을 여럿 남겼습니다. 그 저작 중 하나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입니다. 이 책은 지성적이고 논리적인 신학자다운 영적 영감과 통찰로 넘쳐납니다. 악마가 편지를 통해 인간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C. S. 루이스는 이 책의 후기에서 악마의 삶을 고찰하려는 게 아니고 인간과 삶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는 게 목적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만, 악마의 입을 통해 인간이 지닌 문제와 한계를 비판한 것으로 읽힙니다. 여하튼 저자의 예리하고 날카로운 인간 풍자는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독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도 남을 겁니다. 왜냐하면 악마가 제멋대로 가지고 노는 인간 환자가 곧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악마학교 교장이면서 경험 많고 노회한 악마 스크루테이프(Screwtape)는 조카이자 풋내기 악마인 웜우드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장장 서른한 통의 편지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편지의 내용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간을 어떻게 하면 하느님(악마는 하느님을 원수로 부른다)에게서 떨어트려 놓을까를 궁리합니다.
악마 스쿠르테이프는 자신이 체험한 인간의 삶을 바탕으로 조카에게 성공 노하우를 전수합니다. 인간을 어떻게 유혹하고 파멸시킬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암묵지입니다. 그가 다루는 영역은 다종다양한데, 사소한 일들로 유발되는 가족 간의 갈등, 남녀 차이, 사랑, 웃음, 쾌락, 욕망 등 삶의 전 영역을 다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서른한 통의 편지 중에서 저의 흥미를 끈 편지는, 인간이 현재를 살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에 붙잡혀 사는 이유를 악마의 입장에서 분석한 글입니다. 스크루테이프는 원래 인간과 원수(하느님)는 영원에 가닿는 현재에 관심이 많고, 현재가 주는 은혜와 즐거움에 감사한다고 합니다. 악마는 이 점을 늘 못마땅하게 여겨 인간을 과거 속에 파묻혀 살게 하거나 미래에 열광하도록 만든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열정은 생물학적 필연성에 따라 앞을 향하고 있는 법이므로, 미래에 대한 생각은 당연히 희망이나 두려움으로 불붙게 되어 있다. 더구나 미래는 미지의 것이 아니냐. 그러니 미래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은 곧 비현실적인 허상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스크루테이프의 조언은 계속 이어집니다. “거의 모든 악은 미래에 뿌리에 두고 있다”면서, 감사는 과거를 바라보고 사랑은 현재를 바라보지만 두려움과 탐욕과 정욕과 야망은 앞을 바라본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원수가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은 하루 종일 후손들의 행복을 위해 일한 다음(그 일이 자기 소망이라면), 그 일에 관한 생각을 깨끗이 털고 결과를 하늘에 맡긴 채 그 순간에 필요한 인내와 감사의 마음으로 즉시 복귀하는 인간이라고 합니다. 그에 반해 악마가 원하는 이상형은 미래에 잔뜩 가위눌려 있는 인간, 금방이라도 천국과 지옥이 임할지 모른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인간, 자기는 생전에 보지도 못할 계획의 성패 여부에 믿음을 거는 인간이랍니다.
“우리가 바라는 건 전 인류가 무지개를 잡으려고 끝없이 쫓아가느라 지금 이 순간에는 정직하지도, 친절하지도, 행복하지도 못하게 사는 것이며, 인간들이 현재 제공되는 진정한 선물들을 미래의 제단에 몽땅 쌓아 놓고 한갓 땔감으로 다 태워버리는 것이다.”
스크루테이프는 인간들의 잘못된 희망이 산산조각이 나 실망감과 조급함이 쌓일수록 악마에게는 이득이라면서, 인간들의 모든 의무와 은혜, 지식과 쾌락의 유일한 거처인 현재에 몸담지 못하도록 분쇄하고 공격하라고 지시합니다. 인간은 행복하게 살 이유가 없다면서요. 밉고 얄미운 악마지만, 인간의 허점을 정확하게 찔러대는 데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악마의 말대로 우리는 현재를 머물기를 좋아하지만 마음은 늘 미래에 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는 게 힘들다, 괴롭다, 죽고 싶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현재를 거부하는 바람에 고생을 자초합니다. 악마가 볼 때 인간은 가련한 존재입니다.
악마의 편지는 우리 스스로에게 자문하게 만듭니다. 당신은 현재의 선물을 오롯이 누리고 있는가. 아직도 미래의 제단에 현재를 땔감으로 태우고 있는가. 후자라면 악마가 가장 좋아하는 일에 동참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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