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단단하게 하는 시간
인생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나는 너무 서둘러 여기까지 왔다
여행자가 아닌 심부름꾼처럼
계절 속을 여유로이 걷지도 못하고
의미 있는 순간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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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해,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중에서
박노해 시인은 지난 삶을 돌아보며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라고 고백합니다. 삶의 길을 여행자처럼 걷기보다,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심부름꾼처럼 달려왔다고 말이지요. 한 걸음 멈추어 계절의 풍경을 바라보지도 못했고, 의미 있는 만남을 충분히 음미할 여유도 없었다고 털어놓습니다. 그의 고백에는 삶의 진짜 풍경을 놓쳐버린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시인은 또 달려가느라 스스로 멈추어 서지도 못했고, 대지에 나무 한 그루 심을 틈도 없었으며, 주어진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다고 회고합니다. 무엇을 보았으나 제대로 보지 못했고, 무엇을 들었으나 마음에 닿지 못한 채 흘려보냈다고 말이지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장면입니다.
분주하게 걷는 걸음을 잠시 멈추면 삶의 얼굴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멈추지 못하면 삶은 늘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고, 그 길 위에서 자신조차 뒤에 남겨두기 쉽습니다. 시인의 회고는 바쁘게 살았다는 사실보다 나답지 못했던 시간들에 대한 아픔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그림책 《엄마, 잠깐만!》은 잠시잠깐의 ‘멈춤’이 삶을 어떻게 삶답게 만드는지 보여줍니다. 책 속의 아이는 길을 걸으며 엄마에게 자주 “잠깐만”을 외칩니다. 길가의 강아지와 눈을 맞추고, 공원의 오리에게 빵을 나눠주며, 나비의 날갯짓에도 마음을 빼앗깁니다. 아이에겐 모든 순간이 새롭고 놀랍습니다. 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존재의 시간을 살아갑니다.
반면 엄마는 늘 조급합니다. 열차 시간에 늦을까 시계를 들여다보고, 아이의 손을 잡아끌며 “빨리 가자”라고 재촉합니다. 같은 풍경을 보면서도 전혀 다른 마음으로 살아가지요. 엄마에게 삶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의 연속이고, 아이에게 삶은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일입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이는 다시 엄마를 불러 세웁니다.
“엄마, 진짜 진짜로 잠깐만요.”
급한 마음을 잠시 내려놓은 엄마가 아이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봅니다. 그 순간, 하늘에는 거대한 쌍무지개가 펼쳐집니다. 입을 다물지 못한 엄마, 그리고 그런 엄마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는 아이. 그 장면은 우리가 놓치고 살아온 삶의 본질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에도 무지개는 늘 떠 있었는지 모릅니다. 다만 여유가 없어 보지 못했을 뿐이지요. 아이는 늘 그 무지개를 보고 있었고, 엄마는 잠시 멈추었기에 비로소 볼 수 있었습니다. 시인이 고백한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는 말은, 이렇게 멈춤을 잃어버린 삶의 자화상처럼 읽힙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이런 비슷한 순간을 경험합니다. 아이가 재잘대는 이야기를 “지금 바빠”라는 말로 흘려보내고, 그 순간의 소중한 기쁨을 붙잡지 못한 채 지나쳐 버리기도 하지요. 그렇게 놓쳐온 장면들이 쌓여 어느 날 문득 “나는 삶을 지나쳐 왔다”라고 돌아보게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삶은 소유와 성취만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질주하던 발걸음을 잠시 멈출 때, 우리는 보지 못했던 것들과 마주합니다. 무심히 지나쳤던 길가의 꽃, 바람의 결, 누군가 건네는 작은 호의 같은 것들입니다. 삶은 여전히 분주하게 흐르지만, 가끔은 멈추어 설 때 비로소 나와 나란히 걷게 됩니다.
박노해 시인의 시와 그림책 《엄마, 잠깐만》은 나직하게 말을 건넵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잠시 멈추어도 삶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지나치지 않으며 살아보라고. 그럴 때 인생은 초라한 통과의 시간이 아니라, 놀라움과 충만으로 빛나는 여정이 된다고, 다정하게 속삭이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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