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단단하게 하는 시간
우리는 지금, 가장 많이 연결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알림이 울리고, 수백 명의 얼굴이 손바닥 안을 오갑니다. 하지만 그만큼 마음은 고립되고, 외로움은 더 짙어졌습니다. 대화는 많지만 목소리는 사라지고, 관계는 늘었지만 온기는 옅어졌습니다. AI가 사람의 언어를 대신 하는 시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사람의 체온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2018년 영국이 ‘고독부 장관’을 신설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외로움이 더 이상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질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혼자가 되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잊히는 건 두렵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디지털의 바다는 넓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섬이 되었습니다. 손끝으로는 연결되어 있지만, 마음은 닿지 않는 곳에 살아갑니다. 수십 년 전 마더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질병은 나병이나 결핵이 아니라, 외따로 떨어져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사람들은 더욱 빠르게 연결하려 합니다. 남들이 누리는 것을 놓칠까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화면을 새로 고칩니다. ‘포모(FOMO) 증후군’이라 불리는 이 불안은 타인의 삶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작게 만드는 시대의 초상입니다. 그러나 그 불안한 연결은 오히려 우리를 더 외롭게 만듭니다.
다비드 칼리의 그림책 《4998 친구》는 이 현실을 유머와 통찰로 풀어냅니다. 주인공에게는 제목 그대로 4,998명의 친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 대부분은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고,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습니다. 생일을 잊은 친구, 댓글을 달지 않는 친구를 하나씩 세어가며 숫자를 빼다 보면, 결국 남는 건 단 한 명의 진짜 친구입니다.
"내가 도와달라고 하자, 38명이 돕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정작 집에 온 친구는 한 명뿐이었어요!
지금 내 친구는 한 명이에요.
진짜 친구지요!"
그 친구와 함께 피자를 나누어 먹는 장면에서, 화면 속 세상이 아닌 ‘진짜 연결’의 온기가 피어오릅니다. 책은 말없이 묻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몇 명의 친구가 필요한가?'
휴대폰을 열면 언제나 연결되어 있지만, 정작 내 마음을 건드릴 수 있는 이는 몇 사람일까요. 진짜 연결은 숫자가 아니라, 서로의 시간과 온기를 나누는 경험에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조용히 일깨웁니다.
유홍준 시인의 시 〈사람을 쬐다〉는 그런 온기의 본질을 들려줍니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사람을 쬔다’는 말속에는 인간은 서로를 통해 살아간다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햇살이 따뜻한 이유는 빛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빛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온기 또한 마찬가지겠지요. 누군가의 시선, 손길, 미소 한 번이 차가운 세상을 녹입니다.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못한 사람은 손등에 검버섯이 피고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는 시인의 말은 단순한 은유가 아닙니다. 관계의 단절은 곧 삶의 활기, 즉 빛을 잃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림책의 주인공이 수천 명의 가상 친구 속에서 단 한 사람의 얼굴을 찾듯, 우리도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옵니다. 숫자보다 마음, 데이터보다 체온, 접속보다 눈빛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로 말입니다. 진짜 친구는 함께 피자를 먹으며 웃는 그 순간의 따뜻함 속에서, 우리를 다시 사람답게 만듭니다.
디지털 시대의 연결은 빠릅니다. 하지만 마음의 연결은 느립니다. 연결의 본질은 손끝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누군가를 쬘 수 있는 따뜻한 거리, 그것이 우리가 다시 회복하고 지켜야 할 마지막 인간의 온도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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