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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자수 Oct 27. 2022

갓 스무 살이 넘은 그녀는..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꽃을 피우게 해 준 사람

 


“얼마 전, 제주도 갔을 때 성민이가 그러더라. 모자원에 살 때 엄청 멀었는데 누나들이 어떻게 거기서 학교를 다녔는지 모르겠다고. 그렇게 멀었었냐? 그때 겨우 초등학생이었는데 진짜 버스 타고 어떻게 다녔냐! 잘도 요망 지니까 다녔겠지?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엄마. 학교가 멀었던 거야 둘째치고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한참 걸어가야 했잖아. 집까지 올라가는 길에 뱀 사체가 득실 거렸어. 난 뱀이 파충류라 피도 눈물도 없는지 알았는데 어찌나 바닥이 빨갛게 흥건히 젖어 있던지 지금 다시 떠올려봐도 소름 끼친다니까.”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진가 제주도 영평동에 있는 모자원에서 살았다. 집은 제법 따뜻하고 온기가 있었지만 산속에 있어 집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은 멀고 험난했다. 겨울에는 수북이 쌓인 눈 사이로 자그마한 주황빛 금귤이 새초롬하게 보이는 풍경이 일품이었으나 꽁꽁 얼어붙은 길은 학교와 집을 오가는 발걸음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그때 생긴 동상이 아직도 겨울마다 말썽이다. ) 그뿐인가. 여름이면 온 세상천지 푸른 나무들이 장관이었지만 길바닥엔 뱀 사체가 넘실거려 피로 얼룩진 향연이었다. 레드카펫도 아니고 지금 생각해도 오장육부가 뒤집힌다.


이런 사정을 알길 없을 정도로 엄마는 열심히 살았다. 30년이 지나서야 딸들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에 때때로 그 시절을 떠올릴 뿐이다. 내가 아는 김여사는 참 드세고 당차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순한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바람으로 지어준 '순심(順心)'이란 이름은 남편이 죽자 남편과 함께 땅 속에 묻어버렸다. 


 갓 스무 살이 넘었던 그녀는 남편이 죽자, 일평생 일하느라 손도 발도 마를 날이 없었다. 국민학교를 갓 졸업한 후, 혼자 서울로 상경해 공장일을 했던 그녀는 오랜만에 집으로 내려가던 기차 안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는 여자의 손에 물도 안 묻히고 발에 흙도 안 묻게 한다더니 어린 두 딸을 쏙 빼고 혼자 먼 여행을 떠나버렸다. 시골 촌년이었어도, 작업복을 입고 공장에서 일했어도, 한때 영등포를 주름잡던 패셔니스타였던 그녀는 남편 사망위로금으로  옷가게를 차렸다. 


빵 두 개, 우유 두 개를 가지런히 방에 두고 어린 두 딸들이 잠든 새벽녘에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열심히 옷을 떼다가 장사를 했지만 옷가게는 쫄딱 망했다. 그 후로는 치킨집이며, 분식집이며, 일식집이며 안 해본 식당일이 없었고 요구르트 배달 아줌마 일도 했다. 그러니 어린 두 딸이 어떻게 학교를 다니고, 뱀과의 사투를 어떻게 이겨냈는지 알 길이 없었을 터다. 만약 알았다 하더라도 그까짓 쯤이야. 그냥 돌아서 가라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셨을 것 같다. 




김여사는 그렇게 두 딸을 억척스럽게 키워냈다. 

스무 살이 갓 넘은 그녀에게 아이들이 어려 기억 못 할 테니 갖다 버리라고 이야기하는 고모에게 콧방귀를 뀌며 대학교 공부까지 시킬 거라고 큰소리치셨단다(아니 우리가 쓰다만 짐짝도 아니고. 그녀가 독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면 나는 고국을 그리워하며 이역만리 떨어진 어느 나라에서 글을 쓰고 있었겠지.)

다닥다닥. 옆집이 다소곳하게 붙어 있던 다세대주택에 살 땐 옆집 아저씨가 우리 보고 아빠 없는 애들이 시끄럽게 떠든다고 맨날 씨*이라고 욕한다고 고자질하니 양치질을 하다 말고 냅다 달려가 그분(?)의 멱살도 잡았다. 


그런데 어떻게든 공부를 시키겠다던 그녀의 야심 찬 포부를 꺾는 일이 있었다. 

두 딸을 인문계 고등학교를 보낸다고 하니 나랏밥 먹는 공무원이 한부모 가족이 무슨 공부를 시키느냐 구박을 했단다. 빨리 취업해서 돈을 벌어 자립해야 한다며,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면 학비 보조를 해줄 수 있지만 인문계 고등학교는 해줄 수 없다고.  그녀는 사회복지사에게 “돈이 없고 한부모 가족이면 애들 공부도 못하냐. 가난할수록 더 공부해서 성공해야지!”라고 큰소리치고 나왔단다. (지금은 다행히 한부모가족에 대한 복지혜택이 자리 잡혀 가는 것 같다.)


김여사 덕분에 나는 제주도에서 유명한 사립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오고, 제주도 물을 건너 대학교도 입학했다. 손가락은 빨아도 공부해야 한다고 밀어줬던 김여사 덕분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최근엔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입을 앙 다물고 주먹을 불끈 쥐고 나를 키워낸 김여사는 지난한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나를 꽃피우게 해 준 일등공신이다. 가끔은 모진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어 가슴속을 후벼 파는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밤마다 눈물로 우리를 위해 기도했던 시간을 기억한다.      


어릴 때, 몰래 훔쳐봤던 엄마의 수첩 낙서 속에는 

“하나님! 하나님의 선물인 두 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들 때문에 죽지 않고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적혀있었다. 그 눈물의 기도 속에, 그 무릎의 기도 속에 언니와 나를 잘 키워내셨다.       


외할머니의 억척스러움 때문에 우리 집 딸들은 외할머니를 만나면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기도 한다(요즘 애들은 그림책에 나오는 따뜻하고 자애로운 할머니를 좋아하기 마련이니까). 엄마 박사학위수여식에 따라간 손녀가 울며 떼쓰니 김여사가 조용히 다가가 속삭인다. 

“엄마 좋은 날에 이러면 안 되지. 너네 엄마가 좋으니까 참는 거지. 할머니 같았음 진작에 갖다 버렸어.”


아... 못 말리는 순심 여사는 정녕 순한 마음과 거리가 먼가 보다. 

억척같이 살아야 했으니까, 꽁꽁 붙들고 독한 말들을 내뱉으며 살아야 했으니까 이해는 된다. 

"그런데 엄마. 이젠 우리도 다 컸으니.. 좀 더 너그럽게 이야기해주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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