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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자수 Nov 10. 2021

마흔. 요란한 가을비를 만나다

With 빗방울이 후두둑(전미화)


가을비가 이틀 전부터 연일 쉴 새 없이 내린다. 비는 오는데 갑자기 해가 나질 않나. 갑자기 태풍 같은 바람이 불지 않나. 말 그대로 요란한 가을비다. 아직은 배짱을 부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가을이 이렇게 헤어짐을 고하다니 붙잡고 싶다. 쌀쌀해지는 날씨에 비까지 내려 을씨년스럽기도 하고, 쓸쓸함이 느껴진다. '불과 한 달 전까진 비를 맞아도 안 추웠는데... 지금은 비를 맞으면 큰일 나겠지?!’ 생각하며 한 달 전 일을 떠올린다.




 10월 첫날, 힘든 요가 운동을 마치고 고요함 속에 사바사나(누워서 온몸을 이완시키는 요가 동작)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우르르 쾅쾅!! 천둥번개 치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감히 상상조차 안됐다.

 ‘에이. 설마. 10월인데 여름도 아니고, 장마철도 아니고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겠어?’

연이어 들리는 소리. 우르르 쾅쾅. 후두두둑.

 ‘엇. 이건 진짜 빗소리가 맞는데....’


 어떻게 운동이 끝났는지 모르겠다. 요가원에서 집까지는 대략 15분 거리. ‘이 비가 멈추길 기다릴까? 우산을 살까?’ 고민했. 이미 밤 10시가 넘은 시간. 기다릴 아이들을 생각하니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요즘 시도 때도 없이 갑자기 내린 비로 우산을 너무 많이 샀다. 왠지 모르게 더 이상 우산을 사기 싫었다. 잠깐을 모면하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그냥 뛰자.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



 처음엔 행여 감기라도 걸릴까 두려워 마구 달렸다. '마흔'이 넘은 이 몸 보전을 잘해야 할 텐데...  조금 뛰다 보니 숨이 벅차올라 어쩔 수 없이 걸었다. 걷다 보니 오랜만에 맞는 비가 참 시원하고 후련했다. 쫄딱 젖었지만 괜히 아이마냥 신났다. 이 마음이. 아이 같은 이 마음이 남아 있어 참 다행스럽고, 반가웠다. 이 비를 맞으며 옛 추억으로 마음이 물밀듯 여행을 떠났다.





 학창 시절, 내가 살던 제주에는 비가 자주 왔다. 예고 없이 내리는 비가 마냥 좋았다.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에 내 몸과 마음을 내어 맡기고 싶었다. 비가 오면 쉬는 시간에 친구랑 손잡고 운동장을 뛰었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행동이 아닌 자발적 행동이었다. 선생님들은 “야! 이 미친 xxx"이라고 욕도 하셨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뛰었다. 첨벙첨벙. 일부러 운동장 고인 물만 찾아 구정물이 교복에 튀어도 좋다고 웃었다.


 선생님 보시기엔 너무나도 철이 없는 철부지였을지 모르지만, 우린 나름의 비를 맞는 행위에 대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렇게 예고 없이 내리는 소낙비가 인생의 역경 같지 않냐고.  우린 역경을 마주하고 있는 거라고 웃으며 이야기했었다. (그러고 보면 청소년 때도 인생에 대한 고민을 꽤나 진지하게 했었다. 지금의 아이들도 그렇고....)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가정 내 스트레스, 관계 스트레스 모두 다 빗물에 시원스럽게 씻겨가길 바랐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안에서 들끓는 이 미치겠는 감정을 어찌해야 할 수 없었기에...


 20대 때도, 30대 때도 비에 대한 사랑은 여전했다. 하지만 10대 때와는 결이 달랐다. 필리핀, 치앙마이에서 6개월씩 살았던 그때는 비를 맞는 일이 일상이었다. 그러려니 해야지 왜 예고도 없이 비가 오냐고 화를 내면 안 됐다. 남들은 뛰는데 난 혼자 재밌다며 천천히 걷는 여유를 부렸다. 난 중학교 때 이미 비를 맞아본 여자였으므로.....


 예쁜 원피스, 힐 신고 빗 속을 뛰고 걷고 마냥 즐겼다. 10대 때와 같이 폭풍우 치듯 휘몰아치던 감정은 사그라들었고 다만 '낭만'이란 녀석이 기웃거렸다. 사랑하는 사람과 비를 맞으며 걸었던 추억, 비릿한 빗물 냄새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졌던 날들. 이곳에 살면서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비를 의연하게 맞는 것처럼, 삶에서도 시도 때도 없이 닥쳐오는 일들을 의연하게 맞이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40대인 지금. 10대. 20대. 30대의 빗속의 추억을 떠올려본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희미해져 가는 기억들이지만 내가 생각했던 마음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난  지금 그날의 생각대로 살고 있을까? 10대 때 무모하리만큼 당찼던 마음, 20대 때 의연하게 맞이해야겠다는 다짐..... 대로 나는 살고 있을까? 많은 생각들도 마음이 복잡할 때  “빗방울이 후두둑” 그림책을 떠올린다.



그림책 속 주인공도 난데없이 비를 만난다. 우산을 펼치지만 뒤집힌다. 온 힘을 다해 우산을 부여잡고 비를 피하려고 노력하지만 헛수고다. 달리는 차로부터 빗물 폭탄 세례도 맞는다. 우산을 들고 남들 뛰는 데로 따라가 보지만 넘어진다. 아! 이런 날벼락 아니 빗물 벼락이. 결국 인정한다. 내가 가진 부러진 우산으로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에서 나의 발걸음을 본다.


‘에라이. 모르겠다! 천천히 걸어가자!

글쓰는 일도 소낙비가 가끔 내리겠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해보자!!


40대인 지금, 내 마음에 새기고 싶은 이 마음.

가진 것이 조금 생겼다고, 세상에 대한 얕은 지식이 생겼다고 알은체 하며 내 힘으로 아등바등하지 않는 것.

함께 비를 맞던 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유난스럽게 궁금한 밤이다.



"소나기 없는 인생이 어딨겠어

이럴 때는 어차피 우산 써도 젖어

이럴 때는 아이 모르겠다 하고

그냥 확 맞아버리는 거야"..

갯마을 차차차 홍반장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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