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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자수 Dec 01. 2021

어느 다섯 살 꼬마 소녀의 달콤한 고백

어린이집에 다녀온 다섯 살 꼬마가 선물이라며 고이 접은 쪽지를 내민다. 단풍잎보다 더 작고, 앙증맞은 손. 캐시미어보다 더 부드러운 손을 얼른 잡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쪽지를 받아 든다.

"어이쿠야! 왜 이리 달콤한 향기가 나는 거야? 우리 딸내미가 어떤 선물을 준비했을까?" 흥분이 가득 찬 목소리에 뿌듯한지 얼른 펼쳐보라며 재촉한다. 아이에게 간식의 신세계를 맛보게 해 준 '마이쮸'보다도 더 달콤한 냄새다. 도대체 고이 접힌 쪽지 안에는 어떤 달콤한 말이 담겨 있을까? 이 달콤한 내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엇!" 당황스러운 엄마의 표정은 아직 눈치 못 챘는지 그저 배시시 웃고 있다.

"엄마! 이거 내가 진짜 진짜 아끼던 거야!"

..... 펼쳐 본 쪽지에는 아이가 먹고 난 포도 사탕, 딸기 사탕 껍데기가 붙어 있다. 오늘 선생님을 도와줬다고 칭찬받은 사탕 껍데기를 아이는 버릴 수가 없었나 보다.

"엄마. 내가 사탕을 두 개나 받았어. 하나는 나 먹고, 하나는 엄마 주려고 했어. 그런데 엄마 주면 아빠랑 할머니랑 동생이 싸울 거 같아서 내가 다 먹었어."

어? 그래. 음... 동생은 아직 2돌 지난 아가라 엄마가 안 주긴 한다만. 네 마음이 그랬다면야. 웃음이 나오는 이 상황에 진지한 아이를 바라보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엄마 이거 너무 좋지?"



"엄마. 너무너무 행복해." 볼을 비비며 인사한다. 어라 가만히 살펴보니, 딸기 사탕 껍데기 밑에는 오렌지 사탕 껍데기도 보이고 레몬 사탕 껍데기도 보이는데. '도대체 사탕을 몇 개나 먹은 거지?' 궁금했던 찰나.

"엄마. 이거 레몬이랑 오렌지 사탕은 친구 00가 먹었어. 쓰레기통에 버렸길래 내가 엄마 선물 주려고 붙인 거야." 

아하하. 우리 딸내미.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에 쓰레기통까지 뒤진 거구나. 고... 고... 고맙다.



까막눈이 벗겨지고, 글을 조금씩 알고 쓰게 된 날부터 아이는 곧잘 편지를 썼다. '김 00 네가 엄청 좋고 사랑해.'라는 터프한 고백부터(아들이었으면 더욱 심쿵했으려나?) 진짜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찌르는 편지. 생일 며칠 전부터 매일매일 하나씩 주는 생일 축하 편지까지. 그렇게 아이는 내내 엄마에게 편지를 건넸다.


글을 조금씩 알게 될 때쯤엔 아이 때문에 웃게 된 날도 많았다. 누워서 엄마에게 보냈던 사랑스러운 옹알이와 미소로 웃게 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엉뚱함 때문이었다. 한 번은 공중 화장실을 다녀온 아이가 콧방귀를 뀌며 씩씩거렸다. "엄마. 왜 도둑은 우리 땅이야? 웃기다! 참나!" 뭔 도둑이 우리 땅이야 하고 봤더니 화장실 문 앞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붙여진 스티커를 보고 한 말이었다.


매일 이렇게 사랑 고백하는 아이로 인해, 신선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아이의 엉뚱함으로 육아로 고단했던 일상을 견딜 수 있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매일 사랑고백을 한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자랐다. 지금은 12살 사춘기.

사랑 고백은커녕, "엄마 나빠. 엄마 미워."라는 말을 더 많이 한다. 엄마 바라기 미소는커녕, 엄마를 흘겨보다가 등짝 스매싱받을 뻔한 적도 많다. 엄마한테 혼나면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혼자 비밀 일기를 쓰고 숨겨둔다. 아직 못 봤다. 어디에 숨긴지도 모른다. 보고 싶은 마음도 없다. 괜히 봤다가 너무 충격 먹을까 봐 그녀의 은밀한 마음속은 다 보지 않기로 결심했다. 내가 사춘기 때, 이불속에 숨겨두었던 일기장이 엄마에게 발각돼서 화들짝 놀라고 엄마한테 갖은소리를 다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아이의 비밀은 모른 척 지켜주고 싶다.  


오늘도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을 보이며 방으로 들어가길래 내버려두었다. 글을 쓰다 보니, 5살 때 웃으며 사탕 껍데기를 건넸던 아이가 생각났다. 잠이 안 오는지 뒤척이는 아이 옆에 슬며시 눕는다. 처음엔 고개를 돌리고 등을 돌려 밀어 재끼더니 이내 웃음을 참지 못한 채, 배시시 웃는다. 천진난만하게 사탕 껍데기를 건넸던 그 아이다.

"엄마가 오면 밀어내고 싶고, 엄마가 가면 붙잡고 싶지? 사랑스러운 우리 딸."하고 꼭 안아준다. 뾰루퉁한 표정 반, 웃음 반이길래 "엄마 사랑해?"라고 물으니 대답을 피한다. 하지만 엄마를 꼭 붙든다. 엄마 냄새를 킁킁 맡는다. 그런 내 딸이 사랑스럽다. 무서운 사춘기가 돌진해오고 있지만, 우리 잘 헤쳐나가 보자!


"모든 아이는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에게 헌신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5시가 되면 짐을 챙겨 퇴근하지 않는 사람이 필요하다. 아이를 돌보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그 아이를 가장 사랑해주어야 하고

 그 아이도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모든 아이는 자신을 깊이 사랑하는 누군가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그 사람은 아마도 엄마일 것이다."

 -코넬 대학의 인간발달학과 교수 유리 브론펜브레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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