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노을이 애잔하게 펼쳐지는 시간. 영이는 혼자 자신을 기다릴 아이를 생각하며 재빨리 퇴근을 준비한다. 끊임없이 펼쳐지는 일의 향연 속에 애가 타지만 퇴근 시간은 결국 다가오는 법이다. 그녀는 오늘따라 퇴근길이 더욱 즐겁다. 아이와 함께 읽을 그림책을 빌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한다.
‘아이가 어릴 때는 자기 전 밤마다 그림책을 읽었는데 어느새 커버렸네. 좀 아쉽기도 하고.. 뭐. 자란 만큼 엄마도 잘 기다리니 참 다행이기도 하고.’
그녀의 딸, 혀니는 코로나로 인해 일주일에 2일. 학교를 간다. 학교에 있을 시간에도 집에 있어야 하니 혼자 기다리는 시간이 더욱 길어졌다. 온라인 수업을 챙겨 듣고, 쁘미와 뒹굴뒹굴 거리며 하루를 보낸다. 너무 심심할 땐, 가끔씩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 언제 와?” 하고 묻거나, “엄마. 빨리 와!” 한 마디로 기다림을 묵묵히 감내해본다. 하지만 혀니는 애써 묵혔던 마음을 가끔씩 꿈을 통해 표출하기도 한다.
“혼자 있기 정말 싫어. 외롭단 말이야.”
영이는 그래서 더 분주하다. 그녀는 기다림과 그리움의 감정을 아이보다 더 잘았기에 퇴근길에 박차를 가해 본다. 그렇게도 좋아하는 노을이 영이의 눈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제 아무리 아름다운 주황빛 노을이 자신의 머리 위에 펼쳐져도 그녀 눈엔 다가오는 밤을 알리는 무채색 하늘만 더 들어올 뿐이다.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 앞에서 백 년 만에 만난 듯 서로 반갑게 끌어안는다. 지친 몸을 누일 새도 없이 그녀는 오랜만에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펼쳐 든다. 영이는 자신의 딸에게 제목부터 네 마음에 와닿을 거라며 그림책을 소개한다. ‘엄마, 왜 안 와.(고정순)’ 혀니는 어떤 책일까 궁금하다.
엄마 왜 안 와
그림책 첫 장면에는 색연필과 수채물감으로 표현된 저녁노을이 그려져 있다. 워킹맘에게는 하루 중 가장 마음이 분주할 시간 이리라. 영이는 그림책 속의 엄마가 마치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기다릴 아이를 생각하며 분주하게 퇴근을 준비하는 모습. 퇴근 길이 쉽사리 이어지지 않는 풍경. 열심히 뛰어 전철역으로, 커다란 공룡 배 속(지하철)으로 가는 모습. 몸이 지친 퇴근길에서도 아이 생각에 여념 없는 모습이 마치 자신같이 느껴져 영이는 괜스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다람쥐처럼 날렵하게 뛰어다녔던 그때가 떠올랐다. 영이는 그림책 아이의 외로움과 쓸쓸함이 담긴 빈 여백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문다. 그녀는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혀니는 엄마가 읽어주는 그림책에 집중한다. 가만히 들어보니 “엄마 빨리 와.”라고 말하는 그림책 속 아이가 마치 자신 같다. 혀니는 엄마를 기다렸던 날들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다.
“엄마, 어린이집에서 나 그때, 엄마 맨날 기다렸지. 대개 심심하고 외로웠는데...”
“그래. 우리 혀니가 엄마 참 많이 기다렸지? 많이 외로웠겠다.”
“그래도 엄마. 좋은 점도 있었어. 선생님이 나한테만 사탕 주시고 그랬거든. 사탕 진짜 맛있었어”
“엇?! 그래서 우리 혀니 이가 많이 썩었던 거 아니야?”
서로 깔깔깔 웃으며 간지럼을 태운다. 이 포근함 속에 영이는 다행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린이집에서 혼자 엄마를 기다렸던 기억이 외롭고 서러운 기억으로만 남을까 염려했는데 그 속에서 행복한 기억도 같이 꺼내 보일 수 있다니 대단한 거 아냐?’
혀니는 엄마가 읽어준 그림책을 통해 내가 기다린 시간만큼, 엄마가 얼마나 바쁘게 뛰었을지 어림짐작해본다. 이제 내가 이만큼 자란 만큼, 엄마를 기쁘게 하고 싶다. 혀니는 엄마와 헤어지는 슬픔 만이 아닌 엄마에 대한 자랑스러움도 슬쩍 끼어넣어봐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엄마! 엄마가 아침에 나가면 속상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픈 언니 오빠들 도와주니까 괜찮아. 엄마가 자랑스러워.”
영이는 감격해 웃는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자신의 딸, 혀니는 이러지 않았다.
“엄마는 왜 중학교 선생님이야? 우리 유치원 선생님이면 좋잖아. 엄마 학교 따라갈 거야. 유치원 아니고 엄마 학교 다닐래. 그리고 엄마는 왜 상담 선생님이야?”
"마음이 아픈 언니, 오빠들이 많아. 엄마는 언니 오빠들 이야기도 들어줘야 하고 함께 해줘야 돼. 혀니도 마음 아플 때 엄마 찾지? 언니 오빠들도 그래."
“엄마. 나도 엄마가 필요하지만 내가 양보할게. 엄마 학교 다녀. 그런데 엄마는 몇 살 때까지 학교 다닐 거야?”
아이다운 발상에 영이는 깔깔 웃었던 기억이 함께 떠올랐다. 다 큰 엄마가 아직도 학교를 다닌다는 것이 참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던 아이도 생각났다. 호기심 가득한 아이의 눈을 마주하며 대답했던 기억도.
“엄마는 아직 배울 게 너무 많아. 그래서 계속 계속 학교 다녀야 해!”
영이는 매일 아침, 출근을 준비한다. 혀니는 학교 갈 채비를 한다. 영이와 혀니는 각자 자신의 수준에 맞는 배움의 장소로 떠난다. 그들은 매일 헤어졌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다림의 시간을 채우고 다시 만난다. 기다림의 시간이 마냥 무료한 것은 아니다. 무사히 다시 만났던 셀 수 없는 경험을 통해 기다림 뒤에 만끽하는 기쁨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