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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자수 Oct 30. 2021

 어느 초딩생의 발칙한 반성문

with 그림책 "딸은 좋다(채인선 글, 김은정 그림)"

서랍 속에 꽁꽁 숨겨져 있는 이 비밀 편지는 무엇일까? 엄마를 향한 러브레터일까? 얼핏 보니, 글자를 처음으로 쓰게 된 그날부터 종종 편지를 써서 화장대 위에 올려두었던 첫째 딸의 글씨체이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펼쳐 든 편지는 다름 아닌 반성문이었다. 얼마 전 혼난 후 썼던 반성문인듯한데 이제야 발견했다.

엄청난 반성이 실린 게 분명해. 우리 딸은 엄마에게 짜증 냈던 게 많이 미안했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게 무색해질 만큼..


 웬걸! 읽다 보니 혀가 끌끌 찬다. 흥미진진했던 표정은 양 미간이 찌푸려진 채 일그러진다. 이건 뭐 반성문인지, 항의글인지 주제를 잃은 글이 정처 없이 헤매고 있다.

‘그래 마음을 좀 가라앉혀보자. 음. 그렇다는 거지. 음.. 그래 그랬던 거야.’

이내 읽을수록 웃음이 나온다. 진지하고 깊은 반성이 담겨있어 뿌듯함에서 나온 웃음이었냐고?! 아니. 아이의 발칙함이 얹은 팩폭 콤보에 어이가 없어 나오는 웃음이었다.      



첫째 딸은 이런 아이다. 엄마에게 매일같이 재잘재잘 거리는 아이. 할 말이 아주 많은 아이인 만큼 엄마의 팩트를 콕 찔러 이야기하는 대담함도 지녔다.  2년 전, 아이가 열 살 때 ‘사랑과 효’ 백일장에 나갔다. 또박또박 써 내려간 아이의 글씨가 너무 예뻐서 기특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읽어 내려가다 기함을 토할 뻔했다.

‘엄마의 직업은 상담 선생님이시다. 그런데 나의 마음은 잘 알아주시지 못한다. 그럴 땐 어른들은 몰라요.라는 노래가 이해가 된다.’


 혼자 그 글을 읽었음에도 내 눈앞에 선생님서있는 양,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마치 내 부족함이 전국에 다 까발려진 듯했다. 동네방네 떠들더니 결국 글까지 쓰고 말았다.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아이가 내 앞에 있었다면 윽박질렀을 참이다. 상담하는 친구들에게 글을 보여줬다.

“리니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잘 표현하네. 그래도 엄마가 받아주니까 이런 말도 하는 거야.”

객관적인 시선은 아이의 글을 다시 숙고할 수 있는 차분함을 선사해줬다.


“그래. 그런 거지? 엄마니까. 엄마가 말을 잘 들어주니까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겠지?”

여유가 생기니 글에 담긴 아이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됐든, 그 글은 ‘장려상’을 받았다. ‘사사사.. 랑과 효’ 백일장이었다는데 도대체 어떤 기준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던 터라, 아이의 발칙한 반성문을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A4 앞뒤로 빼곡하게 채운워진 반성문 속에 아이가 무엇이 그리도 억울한 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차근히 살펴보기로 했다. 아이는 먼저 죄송하다는 말을 시작으로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인정한다. 그리고 “지금 시작하는 말을 엄마께서 들으시면 엄마께선 화가 나실 수도 있지만 화내지 말고 차분히 들어주세요.”라고 말하며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시작했다.      


 엄마가 하는 말 “뚱땡이”, “키 작다.”라는 말에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우와. 이게 글자 그대로 적힌 “뚱땡이”를 보니 나는 정말 딸을 마구 비난하는 엄마 같다. 아니. 내 변명을 좀 하자면, 난 절대 아이에게 “뚱땡이”라고 놀리지 않았다. 통통한 둘째 아이의 배가 너무 귀여워서 “똥똥이”이라고 이야기한 건데. 키 작다고 이야기한 것도 키가 작은 내가 자라는 내내 놀림을 받았던 지라 키가 커야 한다고 일찍 자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뿐이었다. 우와 누가 들으면 아주 파렴치한 엄마다.      


아이의 깊은 항변은 다시 이어진다. 마치 독립선언을 외치는 장렬한 열사 같다. 한마디 한마디가 깃발을 높이 쳐들고 내 마음을 포위하러  전진해온다.

“저희는 이제 막 사춘기가 시작되었고, 한창 저희 나이 땐 외모에 관심이 생겨도 티는 안내지만 외모에 은근히 신경 쓰는, 저희 같은 아이들이 많습니다.  엄마께서 계속 이런 말을 하시면 저흰 외모에 대한 자신감을 잃을 수도 있고 모녀 사이가 더 나빠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인정! 엄마는 장난으로 이야기한 거지만 상처가 되었다면 미안해. 하지 않을게.'.라고 나도 모르게 두 손 높이 들고 항복을 외치고 있었다.     


“저희가 아무리 예민한 시기라 해도 화내지 않고 속상한 게 뭔지 말로 잘해야 했는데 말도 하지 않고 짜증만 내서 죄송합니다. 이 행동이 1년 뒤에 고쳐질지 2년 뒤에 고쳐질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꼭 고쳐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이 부분에선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반성문이다. 

“저의 장점을 봐주세요. 저는 단점도 많지만 장점도 많아요.”      

그래. 엄마는 너무나 잘 안다. 우리 딸이 얼마나 장점이 많은 아이인지.... 첨으로 품에 안은 순간, 빛나던 눈, 백설공주보다 더 풍성하고 까맸던 머리카락, 어떤 일이든 하고 싶은 일은 꼭 해내고 마는 끈기. 엄마가 아플 때 내어주는 너의 요리 “볶음밥”...     

 



어느샌가 내 곁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내 아이라고 함부로 판단하고 아이 말대로 장점보다는 단점을 보는 시력만 더 좋아졌는지도 모른다. 내가 늘 이야기했던 대로 아이는 "서로를 더 존중하고, 이해하고, 공감"하면 싸움이 더 줄어들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 중심 상담의 창시자 로저스는 중요한 상담자의 태도를 진실성(또는 일치성), 공감적 이해, 무조건적인 존중으로 보았다. 상담에서는 이 세 가지 태도를 가장 중요하게 본다. 아이는 어느새 커서 엄마와의 관계에서 자기감정을 꾸밈없이 이야기하는 "진실성"은 지녔고, 공감과 존중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음이 어느새 노곤노곤 해지면서 그림책 <딸은 좋다/채인선 글, 김은정 그림>이 떠올랐다. 점점 커가는 아이가 갑자기 엄마에게 화를 내고 뒤돌아서서 미안해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쌓여가는 쪽지들. 처음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의 여정까지 딸과의 관계가 그림책에 담겨있다. 많은 생각에 잠긴다. 그림책에서처럼 매 순간마다 수많은 감정이 오고 가겠지....


아이의 반성문은 내 마음에 ‘부끄러움’이라는 마음 단어를 만나게 해 주고, 아이가 이만큼 자랐다는 ‘가슴 뭉클’한 마음 단어도 만나게 해 준다. 2년 전, 윽박지르려던 내가 이만큼 자라 흥분을 가라앉힌 후 다시 아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었던 것처럼,  아이도 어느새 자라 자기표현을 할 수 있는 아이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성장해간다.





반성은 안 하고
자기 할 말만 했다고
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


                                         네가 알긴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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