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마음엔 왜 이리도 쌉싸름한 미안함과 씁쓰름한 죄책감이 늘 공존하는 걸까? 아이를 키우다 보면 유독 미안함, 죄책감이 들 때가 많다. 무언가를 더 해주지 못해 미안하고 아이에게 상처 준 후 죄책감으로 인해 괴롭고.. 엄마의 삶, 하루의 끝엔 뿌듯함보다 어쩌면 오늘 냈던 "화"에 대해 반성하는 시간이 더 길지도 모른다.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점철된 삶이 엄마의 삶이라면 참 안타깝기 그지없다. 다행히 엄마의 삶에는 아이로 인해 경험할 수 있는 수많은 설렘, 행복, 기쁨 등의 수많은 긍정적 감정도 있기 마련이다.
잠시쉬어갈 틈도 없이 후루룩 국수 말아먹듯 일주일이 지나갔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분주히 달리면 어느덧 토요일 오후가 된다. 얼마 전부터 참여한 워킹맘 집단상담은 바쁨 속에도 편히 쉬어갈 지지대가 되어준다. 그날도 어김없이 한 주의 삶을 보내고 이 자리에 온 나의 몸과 맘을 환영해주었다. “애썼어. 고마워.”라고 나 자신을 토닥이는 짧은 순간의 온전함을 누렸다.
차분해진 마음으로 본격적으로 집단상담이 시작했다. 오늘의 오프닝은 ‘엄마로서 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과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적어보는 시간이다.
‘엄마로서 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요즘 너무 바쁘게 지낸 터라.. 글을 쓴다고, 일한다고 바쁜 엄마로 지낸 터라, 아이들과 보낸 시간이 유독 짧았다. 자연스럽게 '잘하고 있는 것'보다 워킹맘으로 ‘잘하지 못한 것’만 떠올랐다. 좌절스러웠다. 바쁘다고 핑계 대고 눈 한번 그윽이 못 마주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밥을 먹이고, 씻기고, 자기 전 그림책 서너 권을 함께 읽는 의식을 루틴 하게 반복했다. 바쁜 남편은 열외 하고선 혼자서 주말마다 가까운 공원이라도 나가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았다. 심지어 방학 때마다 혼자서 애 둘을 데리고 제주도, 해외 등 열심히 여행을 다녔다. 그렇게 내 몸 부서져라 열정적으로 육아를 감행했던 날들은 어쩌면 나를 위한 보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이만하면 멋진 엄마라고 이야기하면서.
하지만 아이들이 크니 함께할 수 있는 루틴 한 행위들이 많이 사라졌다. 아니, 필요가 없어졌다. 혼자서 씻고, 함께 읽는 그림책보다는 각자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주말에는 엄마를 따라나서기보다 친구랑 놀고 싶은 초등학생이 되었으니 함께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줄었다. 코로나로 여행을 가는 일도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엄마의 어떤 노고가 담긴 일들이, ‘내가 이렇게 애쓰면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어떤 일”이 많이 사라졌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하나도 없게 느껴졌다.
정말 과연 그럴까? 과연 내가 엄마로서 잘하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까?예시를 보니 '정시에 퇴근하려고 애쓴다.'도 있던데. 그래!! 난 매일 정시에 퇴근해서 약속 한 번 잡지 않고 집에 간다. 8년 동안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아이들을 오늘도 픽업한다. 수다 떨고 장난도 친다. 아침에 허겁지겁 나가면서도 아이들을 꼬옥 안아주는 일을 잊지 않는다. 최근에 아픈 날에도 바로 병원 데려가고 병간호를 했다.... 엇 이렇게나 많은데..
그러함에도 난 무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무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했길래 이렇게 잘하고 있는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족하다고만 생각했을까? 정시에 퇴근하는 것, 어떤 약속도 잡지 않고 집에 가는 것을 난 잘하는 것이 아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엄마로서 당연한 것들이라고.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애쓰고 있는 나를 이해하고 토닥여주기보다 우리 안에 집단 무의식처럼 내재된 엄마의 "희생"이라는 것에 감히 도달하지 못한다며 자책하고 있었다. 내 안에는 부족한 점을 끊임없이 비난하고 질책하는 평가자가 매서운 눈길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이다.
나 자신을 평가하기 시작하면 부정적인 시선으로 나를 보게 된다. 스스로 자괴감에 빠진다. 부족함만 들춰내니좌절스럽고 우울해진다.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그러면 우리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아이들이 부담스러워지고 멀리하고 싶어 진다.
아이들에게는 “부족해도 괜찮아.”라고 매일 말하지만 정작 나 자신에겐 왜 이렇게 너그럽지 못한 걸까?
이럴 땐 ‘조금 부족해도 괜찮아(베아트리체 알레마냐 글 그림)’라는 그림책을 다시 펼쳐 든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어딘가 하나씩 부족한 친구들이다. 배에 큼직한 구멍들이 있는 친구, 꼬깃꼬깃 주름져 있는 친구, 물렁물렁해서 힘이 없는 친구, 모든 게 거꾸로인 친구, 찌그러진 커다란 공처럼 생긴 친구. 우리들 눈에는 볼품없어 보이는 이 친구들은 마냥 즐겁기만 했다.
조금 부족해도 괜찮아
하지만 이들의 잔잔하고 평온한 삶 속에 완벽함이라는 친구가 찾아온다. 완벽한 친구에겐 아무것도 할 일 없이 늘어진 이 다섯 친구가 한심하기 그지없다. "너희들은 쓸모없어!."라고 투덜대는 완벽한 친구에게 다섯 친구가 이야기한다. 배에 큼직한 구멍이 있는 친구는 화가 구멍으로 가기 때문에 절대 화를 내지 않는다고. 꼬깃꼬깃 주름진 친구는 그 사이사이에 간직한 추억이 한아름이라고. 거꾸로 친구는 세상 사람들 어느 누구도 볼 수 없는 걸 볼 수 있다고........ 그래! 이 친구들을 보면 완벽하지 않아도, 조금 부족해도 그럭저럭 괜찮은 매력들이 숨겨져 있다.
나 또한 부족한 엄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매력도 지녔는데 내 안의 완벽함이란 녀석이 꿈틀꿈틀 올라와 나를 괴롭히나 보다. 달리 생각하면아이들이 어릴 때와 달리 지금은 어떤 행위 자체가 아닌 다른 사랑 방식이 필요하다. 아이가 어릴 때처럼 어떤 일(책 읽어주기, 씻기기, 밥해주기 등)을 해야만 좋은 엄마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이제는 다른 방식의 사랑이, 정서적으로 더 돌보고 사랑할 수 있는 엄마가 아이들에게 필요하다. 그러니 요즘 나는.... 그저 이렇게 자란 아이들을 어디까지 돌봐야 좋은 엄마인지 잠시 잠깐 헤매고 있는 엄마이다. 그런 건데 뭐가 또 그렇게 부족하다고 평가하고 비난하고 있었는지.
자유로운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평가자에서 따뜻한 관찰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쉴 새 없이 나 자신에 대해서든, 어떤 것이든 평가한다. 있는 그대로 흘러가도록 수용하는 게 참 어렵다. 수용 전념 치료는 어떤 것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요가 운동을 할 때 간혹 선생님들이 눈을 감고 명상을 할 때, 어떤 감정이든 올라와도 괜찮다고 그냥 그렇구나 하고 흘려보내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평가했을 때 순간적으로 좌절감, 우울감 등이 마구 올라왔다. 하지만 평가자에서 관찰자로 시선을 돌려 ‘아~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 아. 내가 지금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구나.’라고 읽어주니 그새 좌절감과 우울감 등의 감정은 사라지고 나 자신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오늘은 부족해도 괜찮다고. 완벽하지 않다고 괜찮다고 나 자신을 토닥여줄 것이다.
이만하면 괜찮다고, 그럭저럭 괜찮은 엄마(good enough mother)라고 위로해줄 것이다.
**다음 편엔 그렇다면 엄마로서 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될 때 스스로 평가하여 자책하기보다 어떻게 부드럽고 따뜻한 관찰자가 될 수 있을지 이야기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