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퇴직하지 마. 엄마가 일해서 난 엄마가 자랑스러웠는데... 엄만 아쉽지도 않고 아깝지도 않아? 지금까지 엄마가 열심히 일했잖아. 엄마가 집에 없는 건 나도 싫지만 엄만 아직 나이가 어려. 퇴직하기엔 이른 것 같아. 날 봐서라도 날 위해서 일 해 엄마가 일 그만두면 엄만 힘들 거야. 열심히 일하는 멋진 엄마............. 우릴 위해서 조금만 더 힘내. 엄마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발칙한 반성문을 쓴 12살 아가씨의 흔적이다. 시달리는 업무, 끊임없는 위기 사안들, 쉬어갈 틈 없는 힘든 직장생활 속에 쉬고 싶었다. 아이들이 아직 엄마랑 같이 있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들 핑계 대고 쉬어가고 싶었다. 너무 지친 어느 날 밤. 아이들에게 “엄마 일 쉴까?”라고 물었다.
아침마다 반복되는 헤어짐이 아직 버거운 10살 내기 둘째. 방과 후 학교 앞에서 엄마가 기다렸으면 좋겠다던 둘째 아이는 “좋아. 엄마. 난 대환영!”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첫째 딸은 아리송한 답변을 늘어놓았다.
“왠지 엄마가 이제 집에 있으면 이상할 것 같은데. 음.. 방에 아무도 없는데 불 켜져 있으면 뭐라고 할 것 같고. 그냥 엄마 돈 벌어서 장난감 사줘!”
음.. 그러니까 너는 엄마가 일을 쉬는 게 싫다는 이야기구나. 어릴 때 엄마는 왜 일하냐는 울먹임에 장난감 사주려면 엄마가 일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었는데 이제 아이가 역으로 말한다. 다음 날 일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엄마가 일할 시간에는 전화를 잘 안 하는 아이라 무슨 급한 일이 있나 싶었다. 전화를 받았더니 대뜸 한다는 말..
“엄마 일 그만둬?? 절대 안 돼.”
“엄마 아직 퇴직하려면 멀었다 !!”
“아 진짜? 휴. 다행이다.”
“왜?”라고 묻고 싶었는데 아이가 먼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는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집에 와서 보니 이렇게 쪽지가 떡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첫째 딸은 이제 엄마가 일하는 게 좋나 보다. 엄마가 없어도 허전함이 안 생기나 보다. 매일 아침 영상 통화하며 다시 집으로 오라던 아이는 어디로 갔는가. 엄마 직장에 따라간다고 투정 부리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가. 엄마 옷 주머니에, 엄마 가방에 들어 가 항상 같이 다니고 싶다던 코흘리개 아이는 어디로 갔는가.
엄마 껌딱지
아이들이 커서 조금씩 내 품에서 떨어져 가니 어릴 때 같이 읽었던 “엄마 껌딱지 <카롤 피브 글/도로테 드 몽프레 그림>” 그림책이 생각난다. 이 그림책에는엄마랑 항상 함께 있길 원하는 아이가 엄마 치마 속에 사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엄마의 알록달록한 예쁜 치마는 날마다 바뀌고 아이는 엄마 치마 속에서 많은 것을 한다. 엄마 치마가 플랩 카드처럼 꾸며져 그 안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엄마 껌딱지로 불렸던 우리 아이들 같다.엄마 품을 영영 떠나지 않을 것 같았던 아이가 이제 심심해진다. 엄마와 꼭 붙어있는 시간의 양을 채웠는지, 정서적 기지(base camp)에서 안정된 애착을 형성했는지 이제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친구들과 같이 논다. 마지막 장면은 매 주말 엄마랑 놀기보다 친구들과 약속을 잡는 지금의 우리 아이들 같다.
아직 지지고 볶을 날이 많이 남았겠지만 아이들과 조금씩 이별하는 기분이다. 한걸음, 한걸음 떨어져 간다. 오늘도 아이들에게 엄마랑 커피숍을 가자고 하니 시큰둥하다. 둘 다 친구의 전화를 기다린다. 몇 번을 이야기해도 꿈쩍도 안 하는 아이들을 두고 결국 혼자 나왔는데 참 어색하다.
처음엔 홀가분해서 커피숍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만큼 가볍게 느껴졌다. 그런데 웬일인지 혼자 걷는 시간이 조금 길어지니 마음 한 켠이 떨어진 낙엽만큼 쓸쓸해진다. 무어라 정의 내리기 힘든 기분에 사로잡힌다.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언제쯤 자유가 찾아오냐 외쳤던 나인데 막상 이런 날이 오니 묘하다. 그때 내가 배부른 소리를 했구나. 내 친구라고 생각하며 30대 청춘을 받쳐 많은 걸 함께 했는데..... 10년 지기 친구랑 헤어지는 기분이다.
자유부인이 되어 혼자 커피숍에서 책을 읽었다. 아이들도 각자 나름의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에게 연락해본다. 그리고 물어본다.
“우리 배드민턴 치러 갈까?”
아이들이 어린 아기일 땐 아이 수준에 맞는 놀이를 했다. 가끔은 엄마가 하자는 건 아이들이 다 좋아할 거라 착각하고, 쪼끄만한게 뭔 생각이 있을까 싶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이제는 아이들이 하고 싶은 놀이와 엄마인 내가 하고 싶은 놀이 사이의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간다.
짝짝이 신발을 신은 듯 엉거주춤했던 발걸음에서, 한쪽만 열심히 내달리느라 한쪽 신발만 닳았던 발걸음에서 이제 균형을 맞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배드민턴'도 같이 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개무량한 발전인가.
그 무엇보다 딸내미 무서워서 일이나 열심히 해야겠다.
p.s 오래된 기사이긴 하지만 2013년 기사를 보니 초중생의 거의 절반이 엄마가 일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하는 엄마가 좋은 이유는 '능력 있는 엄마가 좋아서'란 답변이 34.9%로 1위였고 그 다음으로 `공부 등 학교생활에 도움이 돼서'(26.4%), `내 일에 간섭을 덜 해서'(12.3%), `용돈을 많이 줘서'(9.7%) 순으로 나타났다.(http://www.newsway.co.kr/news/view?ud=2013050816352930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