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중 가장 분주한 시간. 아이들을 깨우고 출근 준비를 하는 워킹맘에게 풀 메이크업은 꽤나 사치스러운 일이다. 나갈 채비를 한답시고, 화장대 앞에 앉아 초고속으로 스킨, 아이크림, 오일 한 방울 섞은 수분 크림을 바른다. 찰나의 순간, 하루를 시작하는 나에게 주는 선물은 라벤더 오일이다. 평온함을 미처 음미하기도 전에 선크림을 치덕치덕 바른다. 점심시간 5분 남짓, 볕에 나갈 요량이면 선크림은 필수다. 가을 햇볕에 소중한 광대를 도저히 내어줄 수 없으니 말이다. 비비크림, 눈썹, 립스틱까지…. 10분이면, 출근 준비 완료.
대부분의 날들은 메이크업인지, 기초공사인지 모를 그런저런 화장으로 마흔의 얼굴을 무장한다. 아주 가끔, 시간이 내편인 날에는, 혹은 특별한 날이라면 후한 인심을 더해 공들여 눈화장을 한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2학기 첫 강의가 있는 날.
얼마 전, 둘째 아이에게 선물 받은 마스카라가 생각났다.
'오랜만에 속눈썹에 힘을 줘볼까?' 싶어 뷰러를 찾기 시작했다. 속눈썹을 말아 올려 마스카라로 덧칠한다면 그야말로 좀 더 또렷한 눈매를 연출할 수 있으리라. 화장품과 쓰레기가 난무한 화장대 위를 아무리 뒤적여도 보이지 않는다. 서랍에 넣어뒀나 싶어 도통 열어볼 일 없는 서랍까지 열었건만, 보이지 않는다.
없.어.졌.다.
아무리 한동안 관심을 안 보였기로선 도대체 어디서 헤매고 있단 말인가. 시간은 흐르고, 마음은 점점 초조해진다. 포기하기엔 애꿎은 마스카라가 애처로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머리를 굴려보지만,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아 애써 펼쳐놓았던 양 미간이 일그러지는 순간.
알. 았. 다.
"임00"
간절함이 가슴팍을 지나 앞니를 두드렸다. 쨍하니 울리는 목소리는 구석진 화장대를 뛰어넘어 방문, 거실, 그리고 그녀의 방까지 다다랐다.
"왜?"
퉁명스럽게 들려오는 그녀의 대답.
"엄마 뷰러 가져갔어?"
다시 한번, 소리를 힘껏 내지른다. 내가 앉아 있는 화장대와 그녀의 방 사이엔 여러 장벽이 존재하기에. (순전히 물리적인 공간 때문인 것이지, 그녀와 나 사이의 벽 때문만은 아니다.)
대답이 없다. 그렇다. 엄마인 나의 촉은 역시나 매섭다.
"빨랑 가지고 와!"
시간에 쫓기는 나의 마음은 황망하나, 그녀는 세상 느릿느릿하다. 파우치에서 주섬주섬 뷰러를 꺼내놓는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기어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올릴 눈썹이 어디 있다고"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화장을 하냐 물었던 학생 주임 선생님과 같은 말투였다. 아이 앞에선 영락없는 꼰대다. 아차! 이번에는 나의 동공이 흔들거렸다. 휴. 다행이다. 웬일로 이 분께서 그냥 넘어가주신다.
드디어 딸내미의 파우치에서 내 화장대로 넘어온 뷰러. 그래. 오늘은 힘을 주는 날이라고. '엄마는 올릴 눈썹이 있나' 보려는 듯 뒤통수가 따갑지만 파티에 나가는 십대 소녀처럼 나는 당당하게 한껏 눈썹을 올린다. 뷰러, 속눈썹을 말아 올리는 이 기구는 화장을 좀 한다 싶은 여자에겐 필수품이었다. 뷰러를 처음 만났던 그날, 신통방통한 물건에 거울을 몇 번이고 들여다 봤는지 모른다. 너무 맹신했던 탓에 있는 힘껏! 꾹 눌러댔다가 속눈썹이 반쯤 잘려나간 일도 있었고, 불을 가하면 속눈썹이 더욱 잘 올라간다는 친구 말에 라이터로 지지다 속눈썹을 태워 먹은 일도 있었다. 아찔한 속눈썹, 아찔한 하이힐로 자존감을 끌어올렸던 시절이 있었다. 예뻐지고 싶고, 예쁘게 꾸미고 싶었던 시절. 그 시절의 이름을 붙인다면 ‘청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름, 뷰러계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S사의 뷰러지만, 지금은 손에 꼽을 정도로 쓸까 말까한, 별볼 일 없는 뷰러가 되어버린 현실이 조금은 서글퍼진다. 이 서글픔은 아마도 돈은 쥐뿔도 없어 도토리나 모으면서도, 화장대에 앉아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에 대한 그리움인지도 모르겠다.
속눈썹을 한올 한올 정성스레 올렸던 그날.
치들린 속눈썹 밑, 커다란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그날.
홍옥 같이 발그레했던 그날.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 그 시간들이 새삼스레 그립다.
그러함에도 오늘 나는..
엄마의 뷰러를 몰래 가져 간 새초롬한 그녀를 보며 웃어보기로 한다.
한올한올, 정성들여 올릴 속눈썹만큼 아이의 일상도 정성껏 가꿔가길 기대하면서.
이 길이 내 길일까? 저 길이 내 길일까? 기웃거리며 다양한 도전을 해보는 아이의 자존감도 한껏 올라가길 기도하면서.